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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훈 칼럼] 지속가능하게 먹는다는 것

입력
2019.03.29 04:40
29면

19세기 말 국내 신문 기사를 찾아 보면 비료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 1900년 4월 4일자 황성신문에서는 일본의 비료품질검사요원 양성과정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구한말 여러 신문의 전반적인 논조는 조선 땅에서의 비료를 활용한 농산물 증산을 촉구하고 있다. 서구 국가의 비료를 활용한 놀라운 농업 생산성에 대한 경외감을 표하는 기사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배고픔의 시대를 극복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농업 생산성 향상이 중요한 키워드였고, 당시 이 땅에서 비료는 지금으로 치자면 ‘3세대 10나노급 8기가 DDR4 D램’과 같은 초 하이테크 혁신급 존재감이었을 터이다.

지구에서 1만년 넘게 이어져 왔던 농업은 오랜 기간 산업이 아닌 종교와 동격인 신성한 것이었다. 인간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며, 인간은 하늘과 땅의 결정에 복종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바로 농업이었다. 그런데 농업이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인간이 식물 성장의 원리를 이해하며 질소 비료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질소 비료의 대량 생산법을 발명한 독일의 화학자 하버(Haber)는 1918년 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질소 비료는 당시 교통과 과학 수준을 고려해보면 정말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각 나라에 대형 비료 공장이 세워졌고, 국내에는 일제에 의해 1927년 흥남에 동양 최대 규모의 비료공장이 건립되었다. 질소 비료를 통해 비로소 농업은 신의 영역을 떠나 인간의 손으로 넘어 왔다.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놀라운 혁신으로 인류는 비로소 기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비료를 개발한 유럽의 과학자들은 이제 아이들을 굶기지 않게 되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런 과학의 진보는 비료뿐만 아니라 농약과 제초제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좋은 품질의 더 많은 농산물을 더 저렴하게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10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인간의 농업 생산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남용했고 결과적으로 땅을 황폐화 함에 이르렀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왔던 암울한 미래의 모습과 같이 황폐화된 땅의 작물은 고통스러워 하며 씨앗을 맺어 후손을 퍼뜨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땅은 말이 없고, 작물은 소리내 울지 못하고 재배당하고 있다.

생산성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비단 농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영양소 중의 하나인 단백질을 공급하는 축산업 역시 생산성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비료를 통해 대량 생산된 농산물은 가축을 위한 사료로 쓰일 수 있게 되었고, 동물의 생장 속도도 인간이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산성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제한된 공간에서의 밀집 사육이라는 비윤리적인 고통을 가축에게 주었고, 축산 배출물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은 하천을 오염시켰다. 우리는 과연 우리 다음 세대에게 어떤 생산 기반을 물려 줄 수 있을까? 우리 다음 세대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전 지구에서 지속가능한 먹거리 생산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다. 영리하게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양보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졌다. 파멸의 씨앗이 잉태된 것을 확인하자 바로 반성하고 행동을 바꾸기 시작한다. 오늘만을 위해 살던 인간은 길게 즐기는 방법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농업 생산자들은 땅을 살리기 위한 친환경, 유기농 재배를 시작했고, 축산 생산자들 역시 동물복지를 구현하고 있으며, 친환경적인 사육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생산성을 일부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미국이 뒤를 이었으며,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가 함께 걷고자 하고 있다. 전 세계의 소비자들도 이런 생산자들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과 육류에 기꺼이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한 발 양보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논의에 소비자들의 역할과 소비 행동은 중요하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걸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환경주의자들은 소비자의 육식을 비난하고 축산업을 악의 축으로 몰고간다. 마치 고기를 먹는 것이 지속가능한 미래의 큰 재앙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려한다. 큰 오해다. 인류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세운 것은 먹거리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하고 지속가능하게 소비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지,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정 먹거리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과격한 논리를 따르다보면 결국에는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을 포기하고 다시 채집과 수렵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것이 우리가 원하는 길인가? 우리는 더 오래, 더 잘 먹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조금 양보하고, 함께 협력하면 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푸드비즈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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