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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시스템 첨단화 뒤엔, IT 개발자 ‘죽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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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는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
핀테크 시대, ICT업무 늘며 쥐어짜기… 복잡한 하청 ‘과로의 외주화’
프리랜서들 극한의 실적 압박에 2~3년간 6명 과로사ㆍ극단적 선택
‘모든 프로젝트는 기한 내에 끝내야 하는 빅뱅 방식이었다. 쫓기고 쫓기는 중압감은 상상을 넘어선다. 수행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발자들을 쥐어짠다. 수행사의 수익은 개발자들을 쥐어짠 결과물이다. 개발자들은 스트레스에 공황장애, 뇌졸중, 심근경색 등 항상 위험에 놓여있다. 과연 개인의 죽음일 뿐인 건가?’(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2018년 12월 12일 ‘어느 IT개발자의 죽음’ 중)
‘무리한 수정 요청과 실적을 체크하는 그들의 무시와 압박은 모멸감을 가지게 합니다.(중략) 책임감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데 우리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만 합니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2019년 2월 8일 ‘비씨카드 IT개발자의 죽음’ 중)
두 달 사이 두 명의 개발자가 숨졌다. 2018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별관 2층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차모(40) 차장. 그리고 지난 2월 5일 설날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모(52) 이사. 둘은 각각 산업은행과 비씨카드의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된 중견 개발자였다. 두 사람의 사망 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함께 일한 익명의 동료 개발자의 글만 고발장처럼 남았다. 정보통신기술(ICT)업계 관계자들은 이들의 죽음에 대해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매번 차세대 프로젝트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까지 고발했다. 수차례에 걸친 업데이트 끝에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속 금융기관 애플리케이션이 지금처럼 돌아가기까지, 개발 현장에서는 어떤 아수라장이 펼쳐졌던 것일까. 이공계 취업자들의 ‘막장’이 되어버린 금융기관 차세대 프로젝트의 실태.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이 부서지고 끝내 죽음까지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5년차 개발자로 뻥튀기 “머릿수 채우기”
“비록 두 달의 경험이었지만,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이 얼마나 엉망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어요.” 김성호(가명ㆍ32)씨는 외국계 모 생명보험사의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됐던 경험을 털어놨다. 2년 전 초급개발자(경력 2년)에 불과했던 김씨는 5년차 경력 개발자로 경력이 뻥튀기 된 채 고객정보 관리 시스템 업그레이드 작업에 투입됐다. 그가 직원으로 속해있던 4차 인력파견업체의 지시였다. 이미 작업 마감 기일을 한 차례 어겼던 골칫거리 프로젝트. 고급 개발자라면 절대 발 담그지 않을 상황이 벌어지자, 인력파견업체는 모자라는 인력을 채우기 위해 김씨를 다년 경력자로 속여 보낸 것이다.
5년 경력자로 둔갑한 김씨에게 출근 첫날부터 터무니 없는 상황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을 동원해 일해야 하는데 물어볼 사람 하나 없었죠. 혼자 여러 층을 돌아 다니면서 ‘이거 아시는 분 계신가요’하며 물어 해결해야 했어요. 저는 ‘갑’(생명보험사)에게 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채워진 머릿수에 불과했던 거에요.”
마감을 다투는 금융회사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엔 한 줌의 배려도 없었다. 김씨와 같이 ‘1인분을 못하는’ 개발자 대신 프로젝트의 개발을 도맡는 개발자들에게는 업무가 몰렸다. 김씨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오래 일했던 대리님에겐 새벽에도 업무지시 전화가 왔고, 아예 생명보험사 직원들이 규정을 어기고 그의 뒤에 서서 직접 지시를 내리는 것도 봤다”고 말했다.
김씨가 느낀 현장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생명보험사와 1차 업체는 개발자들에게 ‘당장 끝내지 못하면 다 같이 망한다’며 피가 마르게 압박했다. 야근은 기본이었다. 김씨가 처음에 들은 ‘저녁 8시 즈음 눈치 보고 퇴근하면 된다’는 언질은 지켜지지 않았다. 주말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고객(생명보험사)에게 보여주기 위한 주말근무를 하라’는 공지까지 내려왔다. 김씨는 “개발자들이 밖에 나가 저녁 먹는 시간을 줄이려 피자 등 배달음식을 시켜줬다”고 말했다.
건강 악화는 덤이었다. 김씨는 두 달 만에 과민 대장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프로젝트 초기 투입됐던 개발자들은 얼굴빛부터 검었다”라며 “가장 일이 많은 과장급에겐 허리디스크가 흔해 도수 치료 정도는 모두가 받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몸이 축나자 저녁 7시에 ‘칼퇴’하고, 밖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는 등 ‘튀는’ 행동을 했던 김씨는 예정보다 이른 석 달 만에 계약종료 통보를 받았다. 그의 첫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 경험이 막을 내렸다.
금융기관의 ‘차세대 프로젝트’란 기존 전산망을 뒤엎고 사실상 시스템을 재창조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시스템 통합(System Integration·SI)을 기반으로 금융사들이 금융과 정보기술을 결합하는 핀테크(fintech) 서비스 확대 경쟁에 몰입하면서 크게 느는 추세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는 차세대 프로젝트를 맡아줄 기술인력이 부족하면서 김씨의 경우처럼 경력을 ‘뻥튀기’하거나 이른바 ‘IT보도방’이라 불리는 인력파견업체들이 기승을 부린다.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에겐 오아시스로 다가온 차세대 프로젝트. 그렇지만 ‘차세대’라는 허울좋은 일자리의 실체는 오아시스는커녕, 개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개미지옥이었다.
◇8차, 9차, 10차 하도급···”조건은 갑 마음대로”
보험, 은행, 카드사를 망라하는 금융계 차세대 프로젝트는 돈과 직결되는데다 고객이 사용하는 시스템, 고객사 직원들을 위한 시스템으로 나뉘면서 더 까다롭고, 많은 개발자가 필요하다.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IT노조) 관계자는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는 통상 6개월에서 1년 6개월 가량 진행되는데, 많게는 1,000명 이상의 SI 개발자가 투입된다”고 말했다. 가령 발주처(갑)가 은행이라면 LG CNS, SK C&C와 같은 대기업이 큰 프로젝트의 하도급(을)이 된다.
1,000여명의 SI 개발자가 투입되는 차세대 프로젝트는 과연 어디서 이 많은 사람을 끌어 올까. 8차, 9차, 심지어 10차까지 달하는 하도급 업체들은 프로젝트별로 상당수 프리랜서 개발자들과 계약을 맺고 프로젝트에 이들을 투입시킨다. 김성호씨는 이런 인력파견업체나 다름없는 하도급업체 소속 정규직원이다. 김씨는 “겉으로는 멀쩡한 IT회사 간판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런 기술 없는 인력파견업체에 불과하다”며 “국비 지원학원을 졸업하고 경력이 없어 프리랜서로 바로 일할 수 없으니 이런 회사 소속으로 있으면서 프로젝트에 파견 가 경력을 쌓는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프로젝트에 투입된 개발자들은 직급별로 부장, 차장 과장을 달고 일하지만, 모두 소속 회사가 다르고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만 일하는 ‘점’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경력 15년차 40대 조원국(가명)씨는 “차세대 프로젝트가 힘든 이유는 갑은 계속 조건을 바꾸는데 일정은 전혀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공공기관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됐던 조씨는 시스템 오픈 당일 무려 300여개 수정 요구 사항을 전달받은 경험이 있다. “예정일을 보름이나 넘기고 겨우 맞춘 오픈 당일 행사장에서 발주회사 임원이 손뼉을 치다 ‘정말 미안한데 좀 바꿔야 되겠다’고 말하며 수정 항목을 불러줬어요. 결국 닷새 정도만 쉬고 돌아와 한 달을 더 일해야 했죠.”
이들 개발자는 파견된 회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도 마주한다. 지난해 2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산업은행 IT본부 소속 외주 개발자가 ‘외주 직원들은 비상 계단을 사용하지 못한다’라며 ‘불이라도 나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차세대 프로젝트 개발자들의 분노를 불렀다. 조원국씨는 “공공기관 프로젝트에 투입됐을 때 꼭대기 층에서 일했는데 혼잡한 점심시간 동안 직원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많은 현장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고, 공공기관 프로젝트는 보안상 이유로 휴대폰을 압수하는 경우까지 있는 등 외부와 단절된 환경에서 작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고소득 개발자’? SI 개발자에게는 비현실
개발자는 고소득 직종이라는 인식도 SI 개발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올해 1월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가 발표한 ‘국내 SW프리랜서 개발자 현황과 정책시사점’에서 949명의 SW프리랜서와 SW프리랜서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연평균 소득은 약 3,615만원이었다.
차세대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많은 SI개발자의 임금체계는 10여년 전 대기업들이 만든 '초급-중급-고급-특급'으로 이어지는 등급제를 사용한다. 기준은 ‘SI개발업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다. 개발자 헤드헌팅 회사를 운영하며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인 OKKY의 운영을 맡고 있는 노상범 공동대표는 “이 등급표에 따르면 보통 세전 월급이 3년차까지는 초급 350만원, 4년차이상 중급은 500만원, 7년차 이상 고급 600만원 이라는 식”이라며 “월급을 실력이 아닌 획일적인 연차 기준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페이스북 창립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한국에 오면 초급 개발자'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젊은 개발자는 나가고 버틴 관리자가 죽는다
비정상적인 근무시간과 대우가 만연한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에서 중간관리자 이상 베테랑 개발자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이들이 사망 혹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산업은행과 비씨카드의 사례만 있는 게 아니다. 2010년 설 연휴에는 국민은행 차세대 프로젝트를 이끌던 전산팀장이 프로젝트 오픈 임박 시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IT산업노조는 최근 2~3년간 이뤄진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들에서 최소 6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연아 IT노조 조직국장은 “젊고 가족이 없는 이들은 쉽게 그만둘 수 있지만 SI업계에 오래 몸담은 가족 딸린 개발자들은 발 빼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원국씨는 이 바닥에 오래 남는 걸 사실상 ‘미친 짓’으로 정의했다. “젊을 때만 해도 이 바닥은 ‘34살 때 닭집(치킨집 개업) 간다’고 했는데 갈수록 은퇴나이가 올라갔어요. 그런데 환경이 좋아져 올라간 게 아니라, 후배 세대가 그만큼 안 들어오고, 구하는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이죠.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해도 수당이 제대로 나오는데, 이 업계에 온 청년들은 한 달간 수당 없이 주말 출근, 야근을 하다 보면 ‘미친 짓’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은 ‘도대체 여기선 어떻게 일을 해 왔길래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보나’라며 선배들을 욕합니다.”
악조건에도 개발자들의 목소리가 수면위로 좀처럼 떠오르지 못하는 건 SI업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프리랜서들이 두려워하는 ‘업계 평판’ 때문이다. 16년차 프리랜서 개발자 전이경(가명ㆍ40)씨는 자신이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고 믿는다. 2003년 한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그는 7개월간 발주 업체의 계속된 요구 사항 변경과 업무량에 시달린 끝에 다리를 절게 됐고,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는 등 건강이 망가졌다. 전씨는 “동료 개발자들끼리 1970년대 봉제공장과 다름없는 노동환경이다, 우리 업계에도 전태일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결국 전씨는 계약보다 한달 앞서 회사에 계약 종료를 원한다고 통보했지만 돌아온 답은 지금까지 그의 악몽으로 남았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나가면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했어요. 실제로 이후 어느 프로젝트에 들어가도 눈총을 받았고, 중도에 뛰쳐나온 프로젝트도 많았어요.”
지난해 11월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실과 IT노조가 공동 주최한 ‘양진호 회장 폭행사태로 본 IT노동자 직장갑질ㆍ폭행 피해 사례보고’에서도 “IT업계 블랙리스트 있다”는 협박은 대표적인 직장 갑질 사례로 등장했다. 정 조직국장은 “IT노동자들이 산재 처리 등 정당한 노동권리를 요구할 때 항상 듣는 말”이라며 “실제 금융권 회사들의 인사팀 정기 모임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노동청 특별근로감독 후 포괄임금제 폐지
한편 국내 SI업체 ‘빅3’ 중 하나인 SK C&C가 업계 처음으로 4월부터 포괄임금제를 사실상 폐지하고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기로 해 지금까지 당연시 되어왔던 보상 없는 장시간 근로 문제 해소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SK C&C 노조 관계자는 “포괄임금제 사실상 폐지 수순은 지난해 노조가 포괄임금제 문제와 시간외수당 미지급에 대해 노동청에 요청해 이뤄진 특별근로감독에서 시정조치 결정을 지시한 후 이뤄졌으며, 다만 월 20시간의 시간외수당이 여전히 연봉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대기업 이야기다. 수백명의 프리랜서 개발자들이 서로 다른 하도급 소속으로 일하는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은 정부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다. 정찬일 IT노조 위원장은 “공공기관과 민간의 하도급 업체 계약과 관련한 제재가 있지만, 실사를 나가 위반사항을 적발하는 경우는 드물고 처벌도 약하다”며 “노조가 나서 줄기차게 이슈화하지 않고서는 작업장에 특별근로감독이 이뤄지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2017년 개발자 3명이 사망한 게임회사 넷마블의 야근노동이 논란이 된 후 특별근로감독이 이뤄졌지만 금융계 차세대 프로젝트 현장에서 특별근로감독이 이뤄진 사례는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IT노조와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의원실이 IT노동자의 표준계약서 정립 등을 포함한 관련법 제정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 IT업계 전반적인 실태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고 의원실은 “1998년 입법된 건설노동자 관련 특별법처럼 IT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법을 별도로 만드는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며 “현재는 IT노조와 관련 노조를 통해 요구사항을 종합해 달라고 요청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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