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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한국의 파브르’ 석주명, 현대과학의 씨를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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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석주명의 ‘석주명 나비 채집 20년의 회고록’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현대성을 ‘기술의 현대성’과 ‘해방의 현대성’으로 구분한 바 있다. 기술의 현대성이란 비행기, 텔레비전, 컴퓨터로 상징되는 서구의 기술적 진보와 지속적 혁신을 뜻한다. 이 기술의 현대성을 이끌었던 이들이 바로 자연과학자들이었다.
한국 현대 지성사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은 이러한 자연과학자들이었다. 이 기획에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자연과학자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생물학자 최재천이 유일하게 주목했던 지식인이다. 사회학 연구자인 내가 자연과학 공부와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또 한 명의 자연과학자를 살펴보려고 한다. 생물학자 석주명이 바로 그 인물이다.
마흔두 살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석주명이 남긴 업적은 눈부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 그는 ‘나비 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죽음과 함께 그는 이내 잊혔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그는 재발견되기 시작됐고,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됐다. 석주명을 다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석주명의 일생과 재발견
석주명의 삶과 학문을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이들은 그의 동생인 복식학자 석주선과 언론인 이병철이다. 이병철은 평전 ‘석주명’(1985)을 선구적으로 발표했고, 이후 보완해 다시 내놓음으로써 그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학계 안에선 과학사학자 문만용이 ‘‘조선적 생물학자’ 석주명의 나비 분류학’(1997)을, 철학자 윤용택이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2018)을 발표해 석주명의 연구와 업적을 재발견하는 데 도움을 더했다. 또, 석주명선생기념사업회는 2011년 석주명선생 탄생 103주년 기념학술대회 발표논문들을 묶어 ‘학문 융·복합의 선구자 석주명’(2012)을 펴냈다. 이병철의 평전에 따르면 석주명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석주명은 1908년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고보와 개성 송도고보에서 공부했고,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박물과를 졸업했다. 함흥 영생고보를 거쳐 1931년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취임해 가르쳤다. 송도고보 교사 시절 그는 우리나라 나비 조사에 몰두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연구는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2년 그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소속인 개성 생약연구소에서 촉탁으로 일했고, 1943년 제주도에 신설된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5년 광복 후 석주명은 국립 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을 맡아 주전공인 나비 연구를 이어나갔다. 1947년에는 조선 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해 우리말 이름을 짓고, 이를 조선생물학회에 통과시켰다. 석주명의 관심이 나비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에스페란토 보급과 제주도 연구에도 기여했고,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때 이른 사망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서울에서 술 취한 청년들과 사소한 시비 끝에 피격당해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석주명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1964년에 와서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의 유고들이 발간되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선 석주선의 헌신적인 기여가 매우 컸다. 1980년대 이후 방송에 석주명에 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이병철의 평전이 발표되면서 우리 현대 과학사에서 그의 존재는 분명해졌다. 1990년대에 들어와 초등학교 교과서에 석주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고, 1998년에는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됐다. 2009년 그는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나비 박사’이자 ‘한국의 파브르’
‘석주명 나비채집 20년의 회고록’은 1992년 석주선이 석주명이 남긴 글들을 편집해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신문과 학회지에 발표된 글들과 미발표 원고를 모아 석주명의 연구와 학문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펴낸 저작이다. 서문 격인 ‘사랑하는 오빠를 생각하며’에서 석주선은 말한다.
“6·25동란으로 1·4후퇴 시 체온도 미처 가시지 않은 오빠의 원고 배낭만을 등에 메고 진눈깨비 내리는 아수라장 같은 인천부두에서 해군 LST 배에 올라 피란을 떠났던 일이 (…) 내 생명보다 더 귀중한 오빠의 원고가 진눈깨비에 젖는 것이 안타까워 코트를 벗어 배낭을 덮어씌우고 뱃전에서 오들오들 떨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 책은 ‘나비 채집 20년의 회고록’ ‘국학과 생물학’ ‘제주도의 여다 현상’ ‘에스페란토론’ ‘덕적군도의 학술조사대 보고’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돼 있다. 석주명의 학문 세계를 그가 쓴 글들로 직접 엿볼 수 있게 하는 저작이다. 맨 앞에 놓인 ‘나비 채집 20년의 회고록’(1950)에서 그는 자신의 나비 연구를 돌아보며,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대만의 나비까지 다채롭게 소개한다. 그는 말한다.
“조선산 접류(蝶類)는 약 이백오십종이고 종류마다 조선지도와 세계지도에 기분포(其分布) 상태를 표시했으니 나에게는 이백오십 종류의 분포를 표시한 조선지도와 세계지도가 이백오십매씩 있다. 이 지도들을 보면 각 종류의 분포 상태를 일견으로 알 수가 있게끔 되어 있다.”
문만용은 석주명의 나비 연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나비를 대상으로 한 석주명의 연구는 단순한 목록 작성에서 개체 변이 중요성을 확인하고 동종이명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단계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자연이 아닌 역사 속에 존재하는 나비를 찾는 단계로 나아갔다.”
1940년 영어로 출간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과 1973년 발간된 ‘한국산 접류 분포도’는 그의 대표작들이다. 특히 전자의 ‘조선산 접류 총목록’은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 요청을 받아 집필됐고, 석주명이란 이름을 서구 학계에 널리 알리게 했다.
석주명이 남긴 흥미로운 저작이 ‘조선 나비 이름의 유래기’(1947)다. ‘가락지장사’ ‘까마귀 부전’ ‘각씨멧노랑나비’에서 ‘흰뱀눈나비’ ‘흰점팔랑나비’ ‘흰줄표범나비’까지 그가 주로 지은 나비 이름들은 우리말에 대한 그의 감각과 애정을 짐작하게 한다.
길지 않은 생애에서 석주명은 학술논저 128편, 기고문 180편, 유고집 8권을 남겼다. 장시간의 나비 채집까지 포함하면 그는 우리나라 나비 연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윤용택은 석주명이 ‘나비 박사’ ‘한국의 파브르’ ‘에스페란토 초기운동가’ ‘제주학의 선구자’로 불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세기 전반 참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자연과학을 황량하지 않게 했던 이 경이로운 생물학자를 마땅히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자연과학의 미래
앞서 말했듯, 서구 현대 지성사를 이끌어온 이들의 한 그룹은 자연과학자들이었다. 찰스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일리야 프리고진, 스티븐 호킹, 그리고 토마스 쿤은 그 대표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18년 정부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32명의 한국과학기술유공자를 선정해 발표한 바 있다. 석주명은 육종학자 우장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등과 함께 그 명단에 포함됐다. 32명은 한국 현대 과학기술을 주도해온 이들이었다. ‘석주명 평전’에서 이병철은 말한다.
“나비 분류지리학을 위한 석주명의 발길은, 20년 동안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동에서 최남단인 제주도 남쪽 마라도에까지 안 미친 데가 없고, 나라 밖으로는 일본과 몽골, 사할린과 만주 그리고 대만에까지 이르렀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제자들을 여러 곳에 학교 교사로 파견해 나비를 채집하게 했다.”
석주명과 같은 선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난 100년 우리 현대 과학사를 풍요롭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으로 가는 문턱에 올라선 현재, 자연과학과 기술공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과학기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제일의 관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창의적인 자연과학과 기술공학을 위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다음주에는 안승준의 ‘국가에서 공동체로’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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