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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 부모가 쌈닭이 된 이유… “누구나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본권 위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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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21> 주어지지 않고 쟁취해야 하는 ‘교육 기본권’
쌍둥이 남매의 새 학기가 시작됐고 이번 주부터 학부모총회와 학부모 참관수업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올해 4학년이 된 비장애인 딸과 발달장애인 아들. 둘의 학교생활을 되돌아보다 ‘딸의 엄마’일 때와 ‘아들의 엄마’일 때는 학부모로서의 마음가짐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딸의 엄마일 때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아들의 엄마일 때는 학교와 담임에 부탁할 것도 많고 요구할 것도 많았다. 비단 나뿐이 아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들과 관련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바빠진다. 내 아이의 사례뿐 아니라 아는 지인의 사례, 지인의 지인이 들은 사례 등 학교 현장에서 발생한 일들에 어떻게 대응을 하면 좋을지 의견이 오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법이 등장한다. 단지 아이를 학교에 보냈을 뿐인데 부모들이 법을 운운하며 법적 대응책까지 찾곤 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특수교사와 장애 학생의 부모가 법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붉혀야 하는 것일까?
◇의무는 다해도 마음은 못 준다
먼저 교사의 입장이 되어본다. 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들은 남다른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교육적인 부분을 잘 가르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교실을 잘 운영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특수교사는 더할 것이다.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소수, 즉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있다. 그런 장애 학생을 책임지고 교육하는 특수교사라는 직업은 누가 등 떠민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높은 사명감과 사랑으로 무장한 특수교사 앞에 장애 학생의 부모가 찾아와 법을 운운하며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부모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법 얘기가 나오는 순간 정나미가 떨어진다.
과거 한 특수교사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부모들이 법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마음의 벽이 생긴다. 요구대로 의무는 해줄 수 있지만 마음은 주지 않게 된다. 부모 때문에 정작 아무 죄도 없는 학생에게까지 미운 마음이 든다.”
법 얘기가 나오는 순간 마음속에서 학부모를 ‘적’으로 간주한 비상 신호가 울리게 된다는 얘기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교사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으니 스스로에 대한 보호 본능이 발현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그럼 이번엔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 본다. 교사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왜 일부 장애 학생의 부모는 법을 운운해야만 하는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몰라서가 아니다. 교사만 보면 시비를 걸고 싶은 성격 이상자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법까지 들먹여가며 읍소하고 부탁하고 요구해야 한 가지라도 가까스로 이뤄지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 주말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등서초등학교의 사례가 장애 부모들 사이에 이슈가 되었다. 한 주간지 기자가 장애 학생의 활동지원사로 분해 하루 동안 특수교실 현장에 잠입 취재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참담했다.
휠체어로 등하교하는 학생의 특수학급이 2층에 위치해 있었지만 학교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엄마는 매일 자식을 업고 2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렸다. 엘리베이터를 만들지는 못할망정 특수학급 위치라도 1층에 마련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에 학교는 “학생들과 어울리려면 특수학급이 2층에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해당 학생은 발달장애 외에도 포도구균성 화상을 입고 있었다. 전신의 피부가 벗겨져 있어 주변 환경이 깨끗하지 못하면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에 감염돼 위험한 일이 생긴다. 하지만 학생은 종일 특수교실 맨바닥에서 뒹굴었으며, 기저귀를 갈 때도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힌 매트 위에서 갈아야 했다.
‘특별한 지원’을 위해 특수학교 입학을 희망했지만 일반학교로 배정받은 것부터가 어긋났다. 그래도 그렇게 배정이 됐으면 이제 학교는 그 학생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이라도 구축했어야 했다. 배정은 12월에 이루어지고 특수학급은 이듬해 2월에 새롭게 신설되었는데 그 사이에 학생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제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에 가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 되어버렸다. 학부모가 나서서 법을, 아니 가장 기본적인 기본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반학교 내 장애인 차별
장애인 학생의 교육권은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하 특교법)’으로 보장을 받고 있다. 그런데 특수교육법만으로는 현장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으니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까지 적용한다.
특교법의 내용이 무엇이고 장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적어 내려가다 보면 재미없고 지루한 법 이야기로 지면을 모두 채우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모든 법을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더라도 이 하나만은 기억해야 한다. “장애(의 특성)를 이유로 그 어떤 교내외 활동에 배제되거나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무언가 떠오르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내 아이와 같은 반에 있는 자폐 친구, 그 학생이 배제된 채 진행되었던 학교행사 등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렇다. 등서초등학교의 사례처럼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학교 현장에선 장애 학생들의 차별과 배제가 일상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통합교육 환경의 일반학교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법 위반 사례는 바로 ‘배제’다. 배려를 가장한 채 각종 학교행사에서 배제하는 일, 전학과 유예를 권고하는 일 등이 모두 장차법을 위반하는 일이다. 비장애 학생의 부모에게는 학부모 참관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다는 권유를 하지도 않고, 옆의 학교가 더 환경이 좋으니 전학 가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같은 학교 안에서 비장애 학생에게는 하지 않는 얘기를 장애 학생에게는 당연한 듯 하고 있다면 여기서부터 바로 장애 학생의 기본권을 당연한 듯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특수학교 내 “좋은 게 좋은 거”
그렇다면 일반학교가 아닌 특수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특수학교에서는 또 다른 기본권이 침해를 받곤 한다. 가장 빈번한 게 특교법 관련 사항이다.
장애 학생들은 장애 정도와 특성에 따라 교육적 수준이 천차만별이기에 개별화교육회의(IEP)라는 것을 통해 개별적인 교육 목표를 수립한다. IEP는 특수교육대상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법만 들여다보면 촘촘한 계획수립을 위해 교장부터 담임, 보호자, 특수교육 관련 서비스 담당인력(치료사와 활동지원사 등)도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됐다. 하지만 실제 특수학교 현장에서는 장애 학생이 다수라는 현실적 어려움을 이유로 이렇게 다수의 주체가 참여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 “쉽게 가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딸을 키우면서는 ‘제대로 교육받을 권리’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쌍둥이인 아들을 키우면서는 늘 아들의 권리 찾기를 위해 고심해 왔다. 그런데 그 권리라는 게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한 권리 찾기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장애 부모들이 죽도록 고민하고 애를 써가며 법까지 운운해 얻어내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졌어야 하는 기본권, 누구나 동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 단 하나다. 특수교사와 얼굴 붉히기 싫은 건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나도 그렇다. 투쟁이 싫다. 법은 더더욱 싫다. 그럼에도 법을 알아야 하고 필요할 땐 ‘싸움닭’까지 되어야 한다. 이런 현실은 누구의 잘못일까. 교사의 잘못일까 부모의 잘못일까? 아니면 교육 시스템의 잘못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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