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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절규 아랑곳 않고… 재판 내내 졸기만한 ‘5ㆍ18 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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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광주 법정 출석]
재판장의 생년월일 묻는 질문에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헬기사격 부인은 거짓말” 방청객 고성에 전씨 부부 놀라기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39년 전 폭도들이 들끓었다던 광주 땅에, 그것도 5ㆍ18민주화운동 관련 사건 피고인으로 법정에 끌려 나온 그는 재판 내내 고개를 떨구며 졸았다가 깼다를 반복했다. 법정 밖에선 “1980년 5월 광주 학살에 대해 사죄하라”는 광주시민들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96년 12월 12ㆍ12 및 5ㆍ18사건과 비자금사건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이후 23년 만에 다시 법의 부름을 받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재판장의 질문(인정신문)에 대한 답변이 전부였다.
전 피고인의 회고록(전두환 회고록)과 관련한 사자명예훼손 사건 첫 공판이 열린 11일 오후 2시30분 광주지법 201호 법정.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재판진행 경과 등을 설명하던 재판장인 장동혁 부장판사는 전 전 대통령에게 일어나라고 지시했다. 방청객 103명이 빽빽이 들어찬 법정은 순간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시선을 떨구고 있던 전 전 대통령은 일어서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년월일이 1931년 ○월 ○○일 맞습니까?” “어, 죄송합니다. 재판장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방청석에선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 전 대통령의 ‘알츠하이머 코스프레’를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전 전 대통령은 재판부가 청각보조장치인 헤드세트를 씌워주자 그새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둔 채 깍지를 끼고 재판장의 질문에 비교적 또렷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그는 주소와 직업 등 2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난 뒤에야 깍지를 풀고 피고인석에 다시 앉았다. 전 전 대통령은 검사의 공소사실 고지에 이어 변호인인 정주교 변호사가 자신을 대신해 피고인 모두 진술을 이어가자 의자에 몸을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정 변호사의 적극적인 변호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전 전 대통령은 정 변호사의 모두 진술이 계속되는 30여분 동안 졸다가 고개를 떨치는 모습을 자주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오후 3시34분쯤 “5ㆍ18 당시 헬기사격은 없었다”는 정 변호사의 옹호 발언이 계속되자 한 방청객이 자리에 일어서서 “완전히 거짓말이다. 변호사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전 전 대통령 부부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1시간 15분 만에 공판이 끝나자 방청석에선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부 5ㆍ18 유족들은 “전두환 살인마, 죽여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 부부는 소란에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법정 경위들에게 이끌려 법정 밖으로 나갔다.
전 전 대통령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성난 시민들과 취재진에 가로막혀 32분 동안 차량에 오르지 못하고 수난을 겪어야 했다. 시민들이 그의 차량으로 몰려들면서 진퇴양난에 빠졌고, 경찰이 ‘퇴로’를 확보해주며 길을 터주자 겨우 도망치듯 법원을 빠져나갔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5ㆍ18 관련 단체들은 “전두환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늘과 같은 역사의 퇴행을 경험하고 있다”며 “광주시민들은 아직도 전두환의 진심 어린 사죄를 기다리고 있으며, 성숙하고 냉철한 시민의식으로 준엄한 법의 심판을 똑똑히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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