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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모순과 대결한 불온한 경제학자, 민중 삶 위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

입력
2019.03.11 04:40
수정
2019.03.11 09:18
28면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53>박현채의 ‘민족경제론’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박현채(1934~1995)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은 민중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현채(1934~1995)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은 민중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영향력이 컸던 한 그룹은 이른바 비제도권에서 활동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재야 지식인’이라 불렸다. 재야 지식인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뉘었다. 처음부터 제도권 밖 시민사회에서 활동한 이들이 한 유형이었다면, 권력의 탄압으로 제도권을 떠나 시민사회에서 활동한 이들이 다른 한 유형이었다. 이 기획에서 앞서 다룬 함석헌이 전자를 대표했다면, 리영희는 후자를 대표했다.

광복 이후 이런 재야 지식인들 가운데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 경제학자 박현채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대학 교수가 됐지만, 그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시민사회에서 활동했던 지식인이었다. 그가 학술과 담론 영역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가 펼친 민족경제론은 1970~90년대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이론이었다.

어떤 이론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강제하는 풍화를 이겨내긴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론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그 의의는 재평가되기 마련이다. 민족경제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 초반기에 민족경제론은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이론으로 주목 받았지만, 21세기 현재에는 적잖이 잊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경제론에 담겨 있는 문제의식의 일단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박현채

박현채(1934~1995)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은 민중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현채(1934~1995)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은 민중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현채는 1934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대 이후 그는 ‘민족경제론’ 등 일련의 저작들을 발표해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부상했다. 한편에선 민족경제론이란 독자적 경제이론을 구축했고, 다른 한편에선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켜 ‘사회과학 르네상스’에 기여했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그의 활동은 눈부셨다. 단재학술상을 받았고, 경제학자 정윤형 등과 한국사회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리영희, 김진균, 강만길, 백낙청 등과 함께 진보적 지식사회의 구심을 이뤘다. 한국사회연구소와 한겨레사회연구소를 통합해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하고 공동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95년 62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 개인의 인생에서 구체적인 삶의 경험은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박현채의 삶에서 이채로운 것은 빨치산 경험이었다. 그는 17세에 지리산으로 들어 가 빨치산이 됐고 2년 동안 활동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이를 다뤘다. 소설에 나오는 소년 빨치산 조원제가 바로 박현채였다. 또 그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는데, 이 역시 그의 삶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박현채의 삶을 정윤형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의 현실 참여는 겉으로는 지식운동가의 그것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천의지는 늘 치열했고 시선은 잠시도 운동현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칙을 포기하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그의 학문하는 기본적 태도였다. 민족경제론은 바로 그의 이러한 실천적 삶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민족경제론은 무엇인가

1985년 한길사회과학 강좌에서 민족경제론을 강의하는 박현채.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한길사회과학 강좌에서 민족경제론을 강의하는 박현채.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현채가 남긴 글은 논문을 위시해 1,368편에 달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제도권 지식사회에 밖에서 보낸 그의 삶을 돌아볼 때, 이런 결과와 성과는 그가 얼마나 성실한 학자였는지를 증거한다. 2006년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는 7권으로 이뤄진 ‘박현채 전집’을 펴냈다.

1978년에 발표된 ‘민족경제론’은 박현채의 대표 저작이다. 이 책이 당대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필자가 1979년 대학에 입학하자 선배들이 가장 먼저 추천한 책들은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강만길의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그리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었다.

‘민족경제론’은 박현채가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을 편집한 저작이다. ‘민족경제론’이란 말은 박현채 자신이 주조한 개념이 아니다. 책을 펴낸 한길사에서 일하던 김학민이 제안한 개념이다. 김학민은 박현채의 글들을 읽고 그의 이론에 깃든 두 아이디어를 ‘민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경제의 인간주의적 해석’에 있다고 파악하고 ‘민족경제론’이란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이후 민족경제론은 박현채 경제이론의 핵심 키워드가 됐다. 민족경제론이란 무엇인가. 박현채 회갑기념 논문집인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에서 정윤형은 말한다. “‘민족경제론’은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을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해명하고 그에 대한 체계적 대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실천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박현채 교수의 독특한 한국자본주의의 이론체계이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의 서문에서 말한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은 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에 쫓아 국민경제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민족의 자립•자주의 기초를 조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경제란 농민과 노동자를 포괄한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자립적인 민족경제의 구축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현채는 일제 강점기의 경제 침탈에서 산업화 시대의 차관경제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세기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동을 분석했다. 그는 외국자본에 의존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모델을 비판하고, 자주성•자립성•민주성을 추구하는 민족경제를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그의 논리는 당대 진보 세력에게 한국경제의 매판성과 종속성을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다.

1985년 박현채는 ‘창작과 비평’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해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가 제시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에 맞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학자 김진균과 조희연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민족•민중적 학문의 수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후 박현채는 ‘민족경제의 기초 이론’(1989)을 통해 민족경제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통합을 체계화하려고 했다.

◇지식인의 고독과 사명

1980년대 초 전남 화순 이서면 적벽을 찾은 박현채(왼쪽부터), 노희관 전 전남대 교수, 이돈명 변호사,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초 전남 화순 이서면 적벽을 찾은 박현채(왼쪽부터), 노희관 전 전남대 교수, 이돈명 변호사,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기획에서 앞서 김용섭을 다룰 때 나는 지식인의 고독과 사명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김용섭이 대학사회 안에서 지식인의 고독에 맞서 지식인의 사명에 충실했다면, 박현채는 대학 사회 밖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박현채의 삶과 사상을 다룬 가장 뛰어난 책은 김삼웅의 ‘박현채 평전’(2012)이다. ‘시대의 모순과 대결한 불온한 경제학자의 초상’이 그 부제다. ‘시대의 모순’이 분단체제와 군부독재를 뜻한다면, ‘불온’은 그 시대적 구속에 맞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 저작은 소년 빨치산에서 진보적 경제학자로의 치열했던 박현채 삶의 궤적을 생생히 전달한다.

김삼웅은 ‘민족•민주•민중•자주•민생의 담론이 담긴 민족경제론을 자신의 실천 가치로 삼은 박현채는 전사이면서 학자’였다고 말한다. ‘맨살로 역사의 현장, 지성의 광장에 우뚝 선 이가 바로 박현채’라고 평가한다. 더하여 김삼웅은 질문을 던진다.

“박현채가 살아 있다면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파산에 이어 미국 세계무역기구와 펜타곤 건물이 붕괴된 9•11 사태, 그리고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라는 전지구적인 시위와 2012년 다보스 포럼의 핵심 화두가 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제3의 길’을 내놓았을까?”

김삼웅이 후학들의 몫이라고 지적하듯, 우리 사회는 어떤 경제를 일궈나가야 하는 걸까. 한국경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박현채의 이론은 재고를 요청한다. 한국경제의 그늘을 설명하는 데 그의 분석은 날카로웠지만, 한국경제의 성공을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경제학자 조석곤은, 신자유주의가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제이론이라면, 민족경제론은 형평성을 추구하는 경제이론이라고 평가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어느 나라든 그 핵심 과제가 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놓여 있는 현재, 민중의 삶을 위한 경제라는 민족경제론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는 한국경제의 미래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다음주에는 여운형의 ‘조선 독립의 당위성 (외)’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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