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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아이가 학습 방해할라” 불안해 하는 학부모에게 마음의 편지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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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 엄마, 세상에 외치다] <20> 장애아 엄마의 편지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2학년인 자기 아이의 반에 자폐 아이가 같은 반이 됐는데, 반 엄마들이 자폐 아이가 공부에 방해될 것을 우려해 특수학교로 전학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조성돼 가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의견을 구하는데 마음이 먹먹하다. 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상황이기도 하다.
반 엄마들을 ‘이기적’이라 규정해 버리고 마구 욕을 퍼부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불안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게다가 욕을 하는 것으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장애 VS 비장애’의 대결 구도로 1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필요하다. 장애인과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이해할 기회가. 4월에 진행하는 형식적인 장애 이해 교육으로는 어림도 없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금,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장애 이해의 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심리적 지지 얻기
아들의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생각하면 ‘슬픔’으로만 기억된다.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들이 힘들었냐고? 아니다. 아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알려줬어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힘들었던 건 나다. 내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들의 도전적 행동(문제행동)은 통합교육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했고, 급기야 일부 학부모가 아들의 퇴학을 위해 교육부에 진정을 내자는 움직임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는 정반대 입장에서 또다른 일을 겪었다. 다른 학교에 입학한 비장애인인 쌍둥이 딸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아이와 같은 반이 된 것이다. ADHD 아이의 도전적 행동 역시 반에서 문제가 됐고, 딸 반의 엄마들은 담임에게 학교폭력위원회 개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는 내 아이가 문제가 된 소수자의 입장에서, 또 하나는 소수자를 바라보는 다수자의 입장에서 한 해를 보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무작정 다수자에게 소수자를 받아들이라며 ‘심리적 강요’를 하면 결국 그만큼 ‘심리적 반대’에 부딪힌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2학년이 되면서 방법을 바꿨다. 개학식 날 반 아이들에게 나눠줄 편지를 30통 써서 가지고 갔다. 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편지를 썼지만 사실은 반 아이들보다 학부모들 읽으라고 준 편지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들은 1학년 때와는 다른 우호적인 환경에서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됐다. 어떻게 다가가면 되는지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불안감 해소
“친구들아 안녕~ 나는 김동환이라고 해. 나는 아직 말을 할 줄 몰라서 우리 엄마가 내 마음을 대신해 편지를 쓰고 있어~”라고 시작한 편지에는 아들이 지적장애를 갖게 된 경위, 아들의 특성, 아들과 소통하는 방법, 아들이 도전적 행동을 보일 때의 대처 방법 등을 모두 담았다.
무엇보다 엄마인 내 마음을 담았다. 학부모들은 자신과 다를 것 없는 ‘엄마의 마음’을 그 편지 안에서 발견했다. 학부모총회에서 처음 본 내 손을 잡으며 “편지 잘 읽었다”고 토닥이는 엄마들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우리 모두는 자식을 키우는 엄마들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나면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었다.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엄마가 엄마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빠가 엄마들에게 보내는 편지, 담임이 엄마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처럼 말 못하는 당사자의 입장을 대변해 이해를 구하는 편지. 각자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중요한 건 시기다. 개학식이어야 한다. 지인의 사례에서 보듯 학부모들 사이에 장애 아이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어 가는 데 딱 이틀 걸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대중화 덕분이다.
개학식 날 학교에 갔다 온 아이가 같은 반에 장애 아이가 있다고 한다. 엄마들은 깜짝 놀라며 혹시나 그 아이로 인해 학습에 방해가 될까 걱정한다.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장애 아이 어땠냐고 물으니 ‘울었다’, ‘떼썼다’, ‘소리 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려 했다’ 등의 얘기를 한다. 이제 엄마들은 SNS를 통해 장애 아이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우려를 나눈다.
군중심리는 힘이 세다. 누군가 장애 아이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기 시작하면 모두는 순식간에 그 군중심리에 점령당해 버리고 만다. 어떤 식으로 여론이 발생해 확산돼 가고 불안감이 모두의 마음을 잠식하는지 나는 딸의 사례를 통해 그 흐름을 생생히 지켜봤다.
그런데 개학식 날 반에 장애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바로 그 시점에, 가방을 열었더니 장애 아이 부모가 보낸 편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편지는 장애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동시에 학부모들이 가진 막연한 불안감도 달래줄 수가 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 아이에 대한 초기 여론이 우호적으로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러니 개학식이어야 한다. 개학식에 못 했으면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한 번 형성된 여론, 단단해진 군중심리를 이후에 다시 바꾸려면 배 이상의 노력이 들고 잘 바뀌지도 않는다.
◇왜 학부모인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의무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가는 건 당연한 권리다. 그러니 장애 아이 부모들은 가슴을 활짝 펼 필요가 있다. 못 갈 데를 간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이 통합교육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 권리와 의무는 잘 아는데 현장에선 아는 것만큼 적용이 되지 않는다. 제도적 지원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 모두의 장애인식이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다.
흔히 통합교육이라 하면 원래 학급 담임, 특수교사, 장애 아이 부모의 트라이앵글만 생각한다. 장애 아이 부모들도 교사와의 소통에만 온 노력을 기울인다. 학부모들은 ‘협조의 틀’에서 빠져 있다.
그런데 학생들의 장애 인식은 부모의 장애인식을 대부분 따르곤 한다. 편견이 없던 학생도 엄마가 매일 물어보는 장애인 친구의 근황을 전하면서 엄마의 걱정 어린 말투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며 “장애는 나쁜 것”이란 인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학교에 가면 원반 담임이나 특수교사가 장애인 친구와 잘 지내라고 했지만 엄마는 장애인 친구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다. 심리적 통합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 학부모들에게도 장애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앞서 말한 편지라고 생각한다. 진심 담긴 편지는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받아보는 장애 설명과는 다르다.
일부에선 그런 식으로 미리 정보를 제공할 경우 ‘장애’라는 낙인이 찍힐 것을 우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부모들에게 장애인 친구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장애인이다. 낙인은 이미 찍혀있다. 남은 건 그 낙인이 부정적이냐 우호적이냐 하는 것이다.
학교 현장이라는 게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도 있다. 통합교육 부분이 그렇다.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을 때와 없을 때 현장의 교사는 통합교육의 여건이 얼마나 다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3월 학부모총회 이전에, 4월 장애이해교육 주간 이전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학부모들을 위한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길 바란다. ‘편지’라는 형식의 1차적인 이 조치는 장애 학생만을 위한 조치가 아니다. 장애인이 낯선 비장애인 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잘만 활용하면 통합교육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지만 큰 실천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류승연 작가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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