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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와셋’ 사태 잊었나, 해외 ‘엉터리 학회’에 줄 선 학자들

입력
2019.03.19 04:40
수정
2019.03.19 15: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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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부실 학술기업 ‘비트’ 행사, 서울대 38명 등 한국 471명 참가

‘한국대학교’ 교수라며 가짜 논문 보내도 이틀 만에 참가 허용

등록비 연구비로 충당… 해외실적 중시 풍토 속 모럴 해저드

비트 그룹 주최 학술행사 109건에 발표자로 이름을 올린 한국 연구자만 471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각 학술 행사 홈페이지 캡처
비트 그룹 주최 학술행사 109건에 발표자로 이름을 올린 한국 연구자만 471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각 학술 행사 홈페이지 캡처

입자물리학을 전공한 연구자 A씨는 올해 3월에 열리는 학술 행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메일을 받고 적잖이 놀랐다. A씨가 보기엔 ‘누가 이런 곳에 가느냐’고 생각할 만큼 부실한 학술 행사인데도 국내 연구자들이 속속 발표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지난해 와셋(WASET)이나 오믹스(OMICS) 등 부실 학회가 언론 보도로 화제가 되고 정부가 참여 연구자 징계 및 출장비 환수 조치를 진행 중인데도 별다른 경각심을 느끼지 않는 연구자들에 행태에 분노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사회적 이슈가 됐던 가짜 해외학술단체 문제가 국내 연구진 사회에서 여전히 활개를 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터키의 와셋(WASETㆍ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과 인도 오믹스(OMICSㆍ오픈 엑세스 과학 논문 출판사 및 학회)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의 학술 기업 비트(BIT)다. 국제사회에서 부실 학술 기업으로 낙인 찍힌 비트 그룹이 주최하는 학술행사에 서울대 교수 등 국내 연구자와 기업인, 정부부처 소속 인사 수백 명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한국일보 취재에서 드러났다. 해외 연구실적을 요구하는 학계 풍토 속에서 엉터리 실적이라도 쌓으려는 국내 연구진들이 가짜 해외학술단체들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실 의혹 행사에 한국 참가자 서울대 38명 등 471명

비트 그룹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부실한 학술행사로 연구자들을 끌어 모으는 ‘약탈적인 학술 기업’으로 영문 위키피디아에 소개돼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도서관은 비트 그룹을 ‘의문스러운 학술행사’ 주최 기업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와셋이나 오믹스가 공학 또는 과학분야에 전문화된 학술 행사를 진행한다면 비트는 생명과학에서 사회과학 분야까지 연간 40개 이상의 학술행사를 망라하는 그야말로 종합 학술 행사 기업이다.

[저작권 한국일보]부실ㆍ가짜 해외학술행사 참석 연구자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부실ㆍ가짜 해외학술행사 참석 연구자_김경진기자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대목은 발표자를 비롯한 행사 참석자 선정이 엉터리라는 점이다. 주최 측은 강연자로 참가하고자 하는 연구자는 발표할 논문의 초록을 메일로 제출하도록 하고 있지만, 논문 내용이나 발표자 신원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본보 취재 과정에서 비트 그룹이 주관하는 학술 행사 중 하나인 ‘제4회 로봇 공학 세계총회’ 담당자에게 논문 초록 생성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작성한 가짜 논문 초록을 존재하지 않는 ‘한국대학교’ 교수 이름으로 보내자 이틀 만에 ‘날짜를 잡아주겠다’는 답변이 왔다. 3주 후에는 발표 날짜까지 확정된 답변이 왔다.

이처럼 실체도 불분명한 비트 그룹이 홈페이지를 통해 홍보한 학술 행사만 109건. 이 가운데 한국 대학이나 기업, 정부출연 연구기관 및 공공기관 소속 참가자만 471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대 38명 등 국립대 연구자만 97명에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정부부처, 국립농업과학원 등 공공기관이나 정부출연 연구소 소속도 30명 이상이었다.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가짜 논문 초록을 존재하지 않는 대학 소속 연구자 명의로 제출했지만 비트그룹 행사 담당자는 곧 "발표 날짜를 잡아주겠다"며 회신했다.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가짜 논문 초록을 존재하지 않는 대학 소속 연구자 명의로 제출했지만 비트그룹 행사 담당자는 곧 "발표 날짜를 잡아주겠다"며 회신했다.

◇연구비로 등록비 충당, 해외 실적 요구하는 풍토도 문제

지난해 와셋 파동 이후에도 국내 연구진들이 부실 내지 가짜 해외학술행사에 집착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모럴 해저드 탓이 크다. 학술행사 단체들이 요구하는 등록비가 통상 200만~300만원에 달하지만 참가자 대부분이 사비가 아닌 연구비로 충당하기 때문에 연구자 입장에서는 단체의 성격을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와셋의 경우 매년 1,000여명의 학자와 연구자가 학술지 및 학술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교육부가 각 대학에 참가자 징계를 요청했지만 이미 수십억원의 공적 연구비는 가짜 해외학술단체로 넘어간 뒤였다.

해외 연구실적을 중시하는 학계 풍토 또한 가짜 해외학술단체가 발호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 정부 설립 특정연구기관 연구자 B씨는 “대학교수 임용 심사 때만 해도 아무래도 국내 학술행사보다는 해외 행사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기 때문에 해외 학술대회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어 2년째 비트 그룹 학술행사에 참석했다는 대전 소재 모 대학 C교수는 “보통은 한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학술 행사에 참석하는데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이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고 실적을 쌓는 일거양득을 경험했다”고 실토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부실학회 주요 체크리스트 - 송정근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부실학회 주요 체크리스트 - 송정근기자

일부 교수들은 주최 측이 정상 학술단체인지, 어떤 의도로 행사를 여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교육 당국에서 블랙리스트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대책을 주문하고 있다. 비트 그룹 학술 행사에 두 차례 참여했다는 서울 소재 사립대 D교수는 “주최 기업의 의혹에 대해 처음 들었다”며 “학자들이 소규모로 모여 소통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학술 행사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D교수는 “지난해 문제가 됐던 와셋과 오믹스는 의식적으로 피하지만 다른 학회를 모두 조사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도리어 항변했다.

◇“국가 자원 낭비하는 부실 학회 참가비는 환수해야”

하지만 지난해 와셋 문제가 터지고 국내외적으로 부실 학술지ㆍ학회를 예방하는 가이드라인이 각 대학교나 한국연구재단 등에서 배포됐던 만큼, 연구자들의 부실 학술행사 참석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비판이 비등하다. 국제 학술 행사에 수 차례 참석했다는 정부 설립 특정연구기관 연구자 E씨는 “와셋 문제가 터지고서는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구자들은 이러한 부실 학회에 가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분위기”라며 “장사를 하는 학술 기업을 배불리고 국가 자원을 낭비하는 행위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해외 학술행사 참가비가 국가나 대학 연구비에서 나오는 만큼 가짜 학술행사 경비를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와셋, 오믹스 외 부실학회에 참여한 연구자들에 대해서도 무작정 면죄부를 주는 것보다 학문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법과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학술진흥, 연구윤리 확립 등을 위한 방안을 관련 부처와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근본적으로는 학문 공동체의 정상화가 해법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김찬현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기존 학회와 연구자 공동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그 빈틈을 가짜 학회들이 채우게 된 측면이 있다”면서 연구자 공동체의 각성을 촉구했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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