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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성 “기도하듯 연기… 촬영 마치고 무너지도록 울어”

입력
2019.02.28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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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주연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 열사를 연기한 배우 고아성은 “즐겁게 촬영을 했지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는 무너지도록 울었다”며 “아직 마음에서 열사를 떠나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 열사를 연기한 배우 고아성은 “즐겁게 촬영을 했지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는 무너지도록 울었다”며 “아직 마음에서 열사를 떠나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흑백 스크린에 단단한 눈빛이 아로새겨졌다. 100년 전 열일곱 소녀 열사도 이런 눈빛이었을 것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차디찬 감옥에서 그 눈빛은 죽음을 헤치고 자유를 향한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갔다. “매일같이 기도하듯 연기했어요. 가슴 한편이 늘 뜨거웠고, 또한 죄스러웠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는 배우 고아성(27)의 눈빛에 자꾸만 물기가 어렸다.

27일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항거’)는 유관순 열사가 1919년 3ㆍ1 만세운동으로 투옥돼 죽음을 맞기까지 1년여간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실 여성들과 함께한 옥중 투쟁을 그린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고향인 충남 병천에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실은 교과서에 실렸지만, 이듬해 3ㆍ1 만세운동 1주년에 다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이 8호실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마주한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8호실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꼭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랐다”며 “배우로서 크고 소중한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항거’에서 유관순 열사를 연기했다.

지난해 가을에 촬영을 하고 3개월 남짓 후반작업을 거쳐 3ㆍ1운동 100주년에 개봉하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 왔다. 고아성은 문득 영화 ‘러빙 빈센트’(2017)를 떠올렸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모티브로 제작된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진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세로가 긴 그림을 영화 프레임에 맞추면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준창조에 가까운 그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요. 제가 꼭 그런 심정이었어요.”

고아성은 “다른 무엇보다 열사의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었다”고 했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했다. “쿠바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처럼 위대한 리더들은 주변인에게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항상 물었다고 해요. 리더는 굳은 신념과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라고만 여겼는데, 감독님께 이 이야기를 듣고선 생각이 바뀌었어요. 열사도 눈물 흘리고 후회도 하며 홀로 갈등했을 거예요. 그래서 열사가 8호실 동지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남겨졌을 때 다른 얼굴로 보이길 바랐어요.”

유관순 열사는 감형을 해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자신이 죄수인 것을 부인하며 옥중 투쟁을 벌이다 갖은 고초를 겪는다.
유관순 열사는 감형을 해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자신이 죄수인 것을 부인하며 옥중 투쟁을 벌이다 갖은 고초를 겪는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서 다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이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서 다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이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유관순에게 그리고 고아성에게 가장 큰 힘이 돼 준 건 8호실 동지들이다. 수원에서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김향화(김새벽)와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 권애라(김예은), 다방 종업원 이옥이(정하담)도 실존 인물이다. 당시 3평 남짓 비좁은 옥사에서 무려 25명이 생활했다. 이들은 발이 붓지 않기 위해 계속 옥사 안을 동그랗게 걸었고 빽빽이 선 채로 만세를 외쳤다. 실제 8호실 옥사 크기로 지어진 세트 안에서 배우들도 하나가 됐다. “1주년 만세운동 장면을 준비하며 외로웠어요. 마음이 무거웠고요. 촬영이 시작되고 제가 긴 대사를 마치기까지 모든 배우들이 저를 뜨거운 눈길로 응시해 줬어요. 카메라엔 뒷모습만 나오는데도요. 그때 우리가 연대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옥사를 제외하고 감옥 복도와 외관은 실제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했다. 테스트 촬영을 하던 날, 허름한 수의를 입고 맨발로 복도 끝에 홀로 서 있었던 순간을 고아성은 잊지 못한다. 그는 “허수경 시인의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라는 산문집에 ‘유물은 냄새가 없고 질감만 있다’는 내용이 있다”며 “그 구절처럼 뭐라 설명하기 힘든 질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한 다음날이면 꼭 몸이 아팠다. 고아성은 “그 아픔조차 달게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유관순이 투옥될 때 멍과 상처로 퉁퉁 부은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잠도 자지 않고 촬영장에 갔다. 고문으로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담아내려 5일간 금식도 했다. 고아성은 “큰 임무이긴 했지만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며 생긋 웃었다.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면회 장면은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써서 완성한 장면이라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면회 장면은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써서 완성한 장면이라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고아성은 유관순 열사 서훈 상향을 위한 서명운동에 첫 번째로 서명했다. 최근 정부는 삼일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에게 서훈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제가 한 일은 연기밖에 없는데 감사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겼어요. 제 생애 가장 의미 있는 삼일절이 될 것 같아요.”

영화 ‘괴물’(2006)로 스크린에 데뷔해 ‘설국열차’(2013) ‘오피스’(2015) ‘더 킹’(2017)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갔고,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2015)와 OCN ‘라이프 온 마스’(2018) 등에서 더 깊고 풍성해진 감성을 선보였다. 유관순과의 만남은 고아성을 또 한번 성장시켰다. 그는 “이만큼 용기낸 작품이 또 있었나 싶다”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단단해졌다”고 말했다. “고흐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나 이상으로 실재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내 삶을 다 써도 좋다’고. 열사도 그런 분이었어요. ‘항거’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도 그렇게 꿈꾸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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