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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만나 뵈니 눈물이 납니다” 손으로 허공에 쓴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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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3ㆍ1운동 주도자 허내삼 지사
서대문형무소서 유관순 열사 만나
감시 피해 힘 모으고자 했던 상황
다른 건물 감방과 ‘수신호’로 소통
허 지사의 막내아들인 허상희씨
“아버지, 1ㆍ4후퇴 때 피난 온 뒤
꿈꾸던 고향 못 가보고 돌아가셔”
“내가 벌거벗고 신문 받을 때는 피눈물이 나더니 동지들 만나 뵈니 반가움에 눈물이 납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붙잡혀온 경성(京城ㆍ서울)의 서대문형무소. 개성의 3ㆍ1운동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허내삼(1888~1964년) 지사는 그곳에서 어린 유관순(1902~1920년) 열사를 만났다.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오고 가며 형무소내 독립운동 지사들과 동지애를 쌓던 시절. 허내삼 지사는 다른 감방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와 감시의 눈과 귀를 피해 수신호로 소통했다. “동지들 만나 뵈니 반가움에 눈물이 난다”는 위의 말은 유관순 열사가 창문을 통해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자를 써가면서 전한 내용이라고 한다.
허 지사의 막내아들 허상희(80)씨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유관순 열사가 수신호로 자신에게 전했던 이 말을 기억하고 가끔 자녀들에게 말씀해 주시곤 했다”고 설명했다. 허상희씨는 “감방에 계속 있으면서 창문으로 서로 볼 수 있으니까 손으로 글자를 그렸다는 것”이라며 “그런 식으로 의사 전달을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는 여(女)옥사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남성들이 수감된 다른 건물 감방의 창을 보면서, 혹은 건물 밖으로 나와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허 지사와 수신호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삼엄한 감시의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어떻게든 서로 소통하고 힘을 모으고자 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허내삼 지사는 중간에 다른 형무소로 이감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결국 순국했던 유관순 열사의 사망을 알지는 못했다고 한다.
허내삼 지사는 1919년 개성군 중서면 일대에서 동리 사람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4월 1일 오후 8시까지 몽둥이와 기왓조각을 가지고 개성 송악산 기슭 만월대 부근까지 행진하도록 지휘했다(국가보훈처 공훈록). 개성경찰서에서 출동한 9명의 일본경찰과 마주치자 앞장서서 일경을 포위하고 몽둥이로 내리치며 기왓조각을 던져 맞섰다. 이후 일경과 집단 싸움을 벌이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돼 그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허상희씨는 “아버지가 5년 6, 7개월 만에 출옥하셨는데 엄청나게 수고를 했다”라며 “6ㆍ25 때는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우리 집을 임시지휘소로 삼으려고 가족들을 모두 나가라고 했는데 인민군들이 대청마루에 기미독립선언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애국지사분인지 몰랐다’며 아버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물러났다”는 일화를 전했다. 허씨는 “아버지는 1ㆍ4후퇴 때 재산도 없이 남쪽으로 피난을 온 뒤에 고생하시다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못 가보고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결혼한 상태여서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 북쪽의 큰 누나는 살아 있다며 이제 101세가 된다고 했다.
허상희씨는 당시 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함께 불렀던 ‘독립군가’와 ‘금주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허씨가 부른 ‘독립군가’의 가사는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이천만에 삼천리에 우리 동포는/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거든 독립군의 귀신이 된다/ 청년은 너와 나의 소원 아닌가 싸우러 나가세/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에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이다. ‘금주가’는 ‘삼천리 강산에 동포야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 시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나니라’ 등으로 이어진다. 허씨는 “우리 동네에서 아버지가 사람들(독립운동가)을 집합시켜서 11명 정도 모였고, 그 사람들이 모이면 함께 부르던 노래”라고 전했다.
허씨는 유관순 열사 등 7명이 수감됐던 여옥사 8호 감방에서 만들어진 노래(한국일보 1월 1일자 1면)의 뿌리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설명을 했다. 허상희씨는 8호 감방에서 개사해서 부른 노래의 제목이 ‘선죽교 피다리’로 붙여진 데 대해 “개성 지방에서 널리 불리던 ‘선죽교 피다리’는 지금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허상희씨가 전해준 ‘선죽교 피다리’의 원래 가사는 “개성부 선죽교 피다리는 정몽주가 돌아가신 곳/극사에 피를 흘리신 곳이 선죽교란다/ 외로이 떠 있는 선죽교 다리 위엔 두견새가 울고/ 부는 바람도 슬픔에 노래를 한다/ 부는 바람도 슬픔에 노래를 한다’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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