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오늘 속의 어제] 미중수교 40년 연 닉슨과 마오의 만남...'이이제이’서 ‘패권경쟁’으로

입력
2019.02.17 15:00
수정
2019.02.17 18:10
16면
구독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고 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1972년 2월21일 리처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적성국’ 중국에 방문한다. 세기의 방문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주석과의 베이징 정상회담으로 닉슨 전 대통령은 미ㆍ중 데탕트, 즉 긴장 완화의 시대를 열었다. ‘강경 반공주의자’ 닉슨이 냉전의 흐름을 바꾼 ‘대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순간이었다.

국교수립도 없던 상황, 닉슨의 베이징 방문은 파격 그 자체였다. “닉슨 중국에 가다”(Nixon goes to China)라는 말이 ‘신념이 확고했던 인물이 순식간에 정반대 방향으로의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를 상징하는 유행어로 사용될 정도였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공감하며 대만을 내주었고, 중국은 결코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닉슨을 안심시켰다. 이로서 상해공동성명에서 양국은 20여년에 걸친 적대관계를 끝내고 관계 정상화의 뜻을 밝힌다. 지난해 6월, 70년 적대관계 해소 여정의 첫 발을 뗀 1차 북미 정상회담이 닉슨ㆍ마오의 만남에 비견됐던 이유다.

만남의 성사 배경에는 소련이 있었다. 물론 회담 직전인 1971년 베이징이 먼저 미국 탁구 대표팀에게 초청장을 보내 ‘핑퐁 외교’로 물꼬를 텄고, 같은 해 7월엔 아시아 순방에 나선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배탈을 핑계로 나흘 간 잠적해 중국을 극비리 방문, 치열한 사전 물밑 협상을 진행한 ‘복통 외교’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소련 견제’라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덕분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마오는 친소련 일변도와 ‘초영간미’(超英赶美ㆍ영국을 뛰어넘고 미국을 따라잡음)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1956년 이후 이념 문제와 사회주의 국가 종주국 문제로 불화를 겪어왔던 중ㆍ소는, 1969년 닉슨 취임 직후인 3월 중소 국경 우수리 강 유역에서 무력 충돌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제3세계론’을 주창했던 마오가 미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하고, 닉슨 역시 주적 소련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이는 미ㆍ중 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선택의 결과를 낳았다. 중국 입장에서 본다면 세계가 미ㆍ소ㆍ중의 ‘3극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후 1978년 중국은 공산당 체제 하에서 개혁 개방 정책을 시작하고, 이듬해인 1979년 1월 1일 역사적인 미중 수교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난 40년 미중 관계는 새로운 구도로 정립됐다. 한때 공통의 적을 견제하려 손을 잡았고 이후 양국의 상호의존성은 날로 커져왔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의 패권 국가 부상은 무역전쟁부터 기술패권 경쟁, 인권문제 등 곳곳에서 신냉전의 운조를 드리우고 있다. 양국의 패권 다툼은 세계 질서뿐 아니라 한반도 정세와 직결되는 만큼, 다음달 열릴 것으로 보이는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제로섬 게임을 끝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