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Biz 리더] 생사 갈림길에서... 후지필름 재건 샐러리맨 신화를 쓰다

입력
2019.02.09 14:00
10면
구독

 2000년 휩쓴 디지털 카메라 열풍에 후지필름 위기 

 고모리 회장 2003년 취임 후 구조조정 

 필름 사업 포기하고 화장품, 의약품 등으로 다각화 

 후지필름, 2015년 사상 최고 실적 기록 

후지필름의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이 지난해 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후지필름의 향후 사업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그림 2후지필름 로고.
후지필름의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이 지난해 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후지필름의 향후 사업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그림 2후지필름 로고.

“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신이 부여한 권리로 여겨선 안 된다.”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일본 후지필름 회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회사를 기사회생 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후지필름은 한때 전세계 필름 시장 점유율 2위로 승승장구했던 기업이지만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순식간에 사양 산업으로 내몰렸다. 2003년 회장에 취임한 그는 “당시 디지털 카메라의 필름 시장 대량살상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며 “근본적인 기업 구조 개혁에 나서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필름 사업을 과감히 접고 필름에 대한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화장품, 의료장비, 의약품 등으로 다양한 사업 영역을 개척했다. 그 결과 후지필름과 함께 전세계 시장을 양분했던 코닥이 2012년 파산신청을 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반면, 후지필름은 고모리 회장의 리더십으로 지난 2015년 기준 연매출 2조4,926억엔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갈아치웠다. 고모리 회장은 “진짜 승부는 막다른 위기에 몰렸을 때 시작된다”며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떤 혁신이든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후지필름의 주력 상품이었던 필름.
후지필름의 주력 상품이었던 필름.

 “경영자는 우수한 독재자여야 한다”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03년 그가 회장에 올랐을 때 후지필름은 전세계적인 디지털 카메라 보급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세계 필름 수요는 2001년 정점을 찍은 뒤, 2004년엔 2001년 대비 80%, 2007년 50%, 2009년 20%, 2011년 11%로 축소됐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2003년은 필름 산업이 막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하던 순간으로, 기업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던 것이다.

고모리 회장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취임 다음해인 2004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비전 75’라는 혁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후지필름 창립 75주년이 되는 2009년까지 회사를 완전히 뒤바꾸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회사의 경영목표도 ‘세계 1위 코닥 타도’에서 ‘탈(脫) 필름 구조조정’으로 바꿨다. 전세계 필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던 코닥과의 선두 경쟁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판단해 기업의 ‘환골탈태’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고모리 회장은 가장 먼저 필름사업 부문 인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5,000명에 대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의 감원 결정은 종신고용 문화가 남아있던 일본에선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004년 당시만 해도 후지필름 연 매출의 절반 가까이가 필름사업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모리 회장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많았다.

하지만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모리 회장은 “기업 경영을 민주주의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며 구조조정을 밀어 붙였다. 민주적 방식으로 기업의 중요 결정을 내리게 되면 평범한 결과만 내놓게 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고모리 회장은 “경영자는 우수한 독재자여야 한다”며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 발 빠르게 대처를 한 덕분에 후지필름의 본업인 필름사업은 소멸했지만 후지필름이라는 기업은 소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모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단순한 ‘일방주의’만은 아니다. 그는 과감히 결단하는 대신 철저한 데이터를 수집해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고모리 회장은 사장이었던 2000년부터 세계 필름 수요가 감소세로 바뀐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전세계 카메라 출하 예측 대수, 출생자 수, 여행자 수 등을 토대로 한 분석과 현장 담당자 모니터링 결과를 종합해 그는 필름 사업이 위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만 해도 후지필름이 일본 시장 점유율 70%로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때여서 그의 위기 판단은 누구보다도 현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고모리 회장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 정보를 빨리 파악해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경영자에겐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런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경영자에게 카리스마가 있어도 구성원들을 따라오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모리 회장은 직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소통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구조조정에 앞서 직접 사내방송과 인트라넷을 통해 현재의 기업 상황과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직원들에게 설명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모두 직장을 잃는 사태가 온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수술하는 게 낫다”고 설득했다. 코닥이 2012년 파산한 것을 비춰보면 그의 말은 마음에서 우러난 절실한 호소였다. 그는 “모든 직원과 함께 하는 것이 좋지만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서 “하지만 우리의 구조조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과정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후지필름의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그림 5후지필름의 에볼라 치료제 '아비간'.
후지필름의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그림 5후지필름의 에볼라 치료제 '아비간'.

 필름 원천기술 활용해 사업 다각화 

고모리 회장은 필름 사업을 접는 대신, 지난 수십 년 동안 필름을 개발하며 얻어낸 원천기술을 활용할 방안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막 붐이 일기 시작하던 액정표시장치(LCD) TV 시장이었다. 100가지 화학 합성물로 구성된 20개 층을, 겹겹이 쌓아 만드는 필름은 투명성과 얇은 두께, 균일한 표면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LCD TV에 꼭 필요한 부품인 편광판에서 색상을 조정해주는 ‘TAC 필름’을 만드는 기술과 비슷하다. 고모리 회장은 TAC 필름 시장 선점을 위해 2005년 무려 1,500억 엔을 투자하는 결정을 내렸다. 후지필름은 현재 전세계 TAC 필름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전 세계 LCD TV 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삼성전자와 LG전자도 후지필름에서 TAC 필름을 구입한다.

고모리 회장은 필름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소재가 ‘콜라겐’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콜라겐은 필름의 변색을 막는 항산화 성분으로 쓰이지만 화장품 업계에선 노화 방지 물질로 활용된다. 후지필름은 콜라겐 합성물을 만들면서 다양한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필름 제조과정에서 표면에 항산화 물질을 입혀 유해 활성산소와의 접촉을 막거나, 발색 물질을 나노입자로 곱게 나눠 칠하는 후지필름의 기술이 화장품 개발에 응용됐다. 그 결과 후지필름은 2007년 노화방지기능이 적용된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를 선보였다. 아스타리프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재 일본 내 매장이 4,000개가 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고모리 회장은 의약품 시장에도 진출했다. 필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20만개 이상의 화학성분을 합성해 본 노하우를 후지필름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의약품은 사람 몸에 적용해야 해 화학기술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2008년 제약기업인 도야마화학공업을 1,400억엔에 인수했다. 후지필름은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인 ‘아비간’을 내놓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비간이 에볼라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판명되면서 후지필름은 2020년까지 의약품 분야에서 연 매출 1조엔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모리 회장은 최근 미국 줄기세포 개발 기업인 셀룰럴 다이나믹스도 인수, 재생의학 분야의 신제품 개발에도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고모리 회장의 거듭된 혁신으로 후지필름은 현재 전혀 다른 기업으로 변모했다. 2001년 연 매출의 19%를 차지했던 필름 부문은 지난해 1%로 축소됐고, 사진 관련 서비스도 같은 기간 54%에서 16%로 줄었다. 대신 사무용품, 프린터 등 문서 부분과 화장품, 의약품 등 헬스케어 부문이 그 자리를 메웠다.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뿐 아니라 철강사든 자동차 회사든 많은 기업들이 이제 하나만 고집해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라며 “’왜, 어떻게 기업이 혁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구성원들 누구나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모리 회장이 말하는 경영자의 의무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처럼 기업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경영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4개 있다고 조언한다. 첫째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이다. 경영자는 한정된 시간과 정보만으로 기업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구상(構想)이다. 상황을 읽었으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어느 정도의 속도와 규모로 개혁을 단행할지를 정해야 한다. 셋째는 개혁의 내용을 임직원들에게 전달, 사원들이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조직을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실행이다. 경영자는 학자나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계획한 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겨 성공시켜야 한다.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이 업종 전환에 성공한 것은 이러한 개혁의 4단계 수순을 올바르게 이행했기 때문”이라며 “경영자는 모든 결단을 틀리지 않게 내리겠다는 각오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모리 회장은 기업 경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임명된 전문 경영인도 기업 오너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회사의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때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 입사 10년 차에 과장이 됐을 때 직원 60명을 책임지는 공인이 됐다는 생각을 했다”며 “기업 오너십을 가지면 매사 열심히 생각하게 되고 결국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고모리 회장은 구체적으로 경영자들이 참고해야 할 기업 분석법도 공개했다. 그건 후지필름이 기로에 섰던 2000년대 초 그가 사용했던 ‘4면 분석법’이다. 고모리 회장은 “필름 시장을 대신할 시장을 찾기 위해 회사에 어떤 기술이 있는지를 전부 꺼내 놓고 분석했다”며 “이후 X축을 기존 시장과 신규 시장으로 나누고, Y축을 기존 기술과 신규 기술로 나눠 4분면으로 만든 후 그 4개 영역에 어떤 기술을 적용해 어떤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지 연구해 새로운 주력 제품군을 고안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