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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장난으로 그런 거지?” 동성 성폭력 너무 관대한 법원

입력
2019.01.22 17:26
수정
2019.01.22 21:00
8면

 제자 상습추행 교사 집행유예 등 형량 감경하며 솜방망이 처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고등학교 운동부 교사인 A씨는 숙소에서 자고 있는 B(16)군의 성기를 움켜잡는 등 제자 4명을 8차례에 걸쳐 강제 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작년 5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A씨 범행사실 대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범죄전력이 없다는 등 여러 감경 사유를 설명하며 “이 사건 범행은 동성의 제자들에게 가해진 것으로, 횟수는 적지 않으나 추행 정도가 심하지는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최근 체육계 성폭력 사건이 사회 문제가 된 가운데 남녀 사이뿐 아니라 동성 간 성범죄(본보 22일자 1면 ‘[단독] 체육계 이번엔 ‘동성 미투’… “여선배가 상습 성추행”)도 빈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법정 소송에서는 동성 간 성범죄를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바라보는 법원의 인식으로 피해자 구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법 상 성폭행을 제외한 모든 성폭력 관련 범죄의 주체와 객체는 ‘부녀’가 아니라 ‘사람’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에 따라 법률 적용이나 양형 기준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법조인들이나 사건 당사자들의 법감정은 규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신진희 변호사(법률구조공단 피해자국선전담)는 “십 수년 전만 해도 동성 간 신체접촉은 장난이나 친근감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었다”며 “추행 정도가 경미한 사건일수록 재판부가 이런 인식으로 ‘관용’을 베푸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2017년 3월 한 지방법원은 공장 관리팀장이 하청업체 직원과 담배를 피우다 성기를 만져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동성에 대한 추행으로 이성인 여성에 대한 것과 피해 정도가 같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을 참작한다”고 감경 사유를 밝혔다. 하지만 김영미 여성변호사협회 공보이사는 “동성에게 성폭력을 당하면 수치심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동성 성폭력은 성적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법원의 인식도 문제다. A씨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자신의 성적 만족보다는 피해자들에게 우월적인 지위를 과시하고 지시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작년 9월 50대 남성이 직장 후배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등 강제추행해 재판에 넘겨진 사건에 대한 2심 선고에서 한 지방법원 재판부도 “동성 간 추행으로, 적극적인 성적 목적 하에 행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감경 사유를 설명했다. 법무법인 라온의 김윤호 변호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동성에게 성폭력을 당할 경우 충격이나 수치심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점을 법원이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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