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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아브라함에 이삭 바치라 명령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 고통을 미리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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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아버지와 아들
저 개미새끼 한 마리가 날 이해할 수 있을까. 알 턱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을까. 턱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을 알고 싶어 하고, 신도 인간에게 계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차원이 너무나 다른 존재 간이어서, 마땅한 소통의 기구가 없다. 다만 특별한 기제가 하나 있다면, 인간의 언어다.
하지만 언어는 한계가 뚜렷하다. 논리적인 문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정념조차도 담아 내기 버거워한다. 사람의 심상이 논리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시를 쓰지 않는가. 시적 언어는 문법을 파괴하여, 표현하려는 정념을 논리의 사슬에서 해방시킨다. 그런데 인간 내면도 잘 담지 못 하는 갑갑한 언어가 신의 계시는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종교나 신학서적에는 말이 안 되는 말이 많다. 꼭 엉터리여서는 아니며, 신을 담아 내기에 벅차서 그럴 것이다. 학자들이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글은 더 난해해진다.
하나님도 불가피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성경이라는 계시를 남겼다. 신학자들의 글들과는 다르다. 철학적 논박보다는 이야기와 노래, 비유와 우화, 애절한 편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학 서적보다는 훨씬 읽을 만하다. 심지어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얼마나 큰 변화인지 ‘거듭났다’고 까지 표현한다.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마치 인간처럼, 신인동형(神人同形)적으로 표현한다. 부적절하지만, 인간이 알기 쉽게 성경은 쉬운 어법을 사용한다. 때론 하나님을 왕으로, 아버지로, 목자로, 혹은 군대 대장으로 묘사한다. 인간처럼 연민과 사랑, 자비, 분노를 가진 분으로 표현한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형이상학적 궤변보다는 훨씬 더 접근이 용이하다. 성경이 진정한 계시라면 일부 식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든지 읽혀져야 한다.
그래서 성서 독자는 하나님을 아주 순진하게 파악해야 한다. 성경에 표현된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두발 관리를 잘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다니엘 7:9) 울 제품이 그렇듯, 양털은 다루기 까다롭다. 분명히 하나님은 천상의 헤어 컨디셔너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매우 연로하다. 사실 연세가 측정 불가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히 사신다고 말한다. 시간은 신에게 적용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일지도. 하나님은 연로하시고 그래서 권위와 위엄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외로우실 것 같다. 가족도 없으시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이 가족이 없으신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원시 서아시아 사회에서 어떤 신이 모태 솔로라고 말하는 건, 그 신에 대한 모독일 수 있었다. 최고신은 왕처럼 부자에 큰 가족을 거느리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다소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사실인데, 사실 하나님이 아들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큰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감히 하나님께 어떻게 아들이 생겼는지 물어 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후에 예수는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종종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것을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언급했듯이, 성경은 단순하게 읽혀야 할 당위성이 있다. 여러분들 집에 아들 하나 있듯, 하나님께도 아들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예수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신이니까 있을 법한 일일까. 이 지점에서 또 신학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신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제물로 바쳤다. 지금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편부모다. 그러니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이 컸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 우리 인간을 사랑해서 그러셨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이게 믿겨지는가.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게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두 아들을 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둘이니 하나 내어주라고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던 아버지의 그 고통의 크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아버지인 나는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큰 고통을 감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지, 미리 좀 훈련을 하셨다. 오래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었다. 많은 성서의 독자들이 이 사건을 두고 말이 많았다.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 하나님의 마음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 순간 책상 위의 모니터를 켰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희생 제물로 잡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큰 믿음에 기뻐하고 계셨을까. 아니다. 아마도 그 장면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탄식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아들 예수를 저렇게 데려가야 할 텐데...”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 제단 위에 묶는 장면은 차마 하나님이 눈을 뜨고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자기 아들 예수가 바로 그렇게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 할 때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먼 훗날 자기 자신은 멈추지 않았으며,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로 보내버려야 했다.
심지어 아들 예수가 아버지께 와서 조금만 봐 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예수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마가복음 14:35-36)
어떻게 아빠가 자기 아들의 이런 호소를 마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고통만큼은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전 몇 백 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만 했다. 제물은 뼈가 꺾이고, 살이 뜯기며 피를 쏟았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통을 겪으며 죽어야 할 자기 아들을 맘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그려야만 했다. 몇 백 년을 감내했지만, 예수가 정작 죽었을 때 하늘과 땅은 울부짖었다.
그로테스크하지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바울의 말이 하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 8:32)
신학교 학생인 어느 중년의 아주머니에게 어째서 선교사가 되려 하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자기 아들이 어느 오지의 선교사로 갔는데 가자마자 그곳 원주민에게 살해 당했단다. 위장이 달라붙어 병원에 실려 갈 만큼 처음엔 괴로웠는데, 이제는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아들을 죽인 그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아들이 사랑한 자들이기에, 자기도 사랑할 수 있단다. 이런 비슷한 간증이 기독교 역사엔 수없이 많다. 그 DNA는 다름 아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들 예수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인간을,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실 리 없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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