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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앉아 솔직한 대화로 갈등 푸세요”

입력
2019.01.17 04:4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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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관계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시간ㆍ비용 부담되는 재판보단

조정이 경제ㆍ정신적으로 유리

가족 분쟁은 장기화 경향 많아

조정을 전치 절차로 도입해야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전경근 부장(가운데)과 조정위원들이 수원지부 사무실에서 당사자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사진 대한법률구조공단 제공.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전경근 부장(가운데)과 조정위원들이 수원지부 사무실에서 당사자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사진 대한법률구조공단 제공.

“동파를 막으려고 싱크대 수도를 틀어뒀는데 옥탑방이 추워서 물기둥 모양으로 얼었어요. 그동안 낸 가스비를 배상하세요.”(임차인)

“동파사고로 지하에 누수까지 생겨 피해가 막심합니다. 겨울인데 매일 샤워할 필요는 없으니 수도를 잠그겠습니다.”(임대인)

겨울철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파사고는 곧잘 임대인과 임차인 간 갈등으로 이어진다. 임차인은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사고가 났는데 비용을 지불해야 하나’라며 불만을 품고, 임대인은 ‘단지 집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기후에 따라 발생하는 사고를 책임져야 하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다. 임차인 정은주(가명ㆍ36)씨와 임대인 박준철(가명ㆍ51)씨의 갈등도 이렇게 시작됐다.

정씨는 2017년 7월 경기 안양시 한 주택 옥탑방에 입주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으로 2년짜리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이 건물 소유자인 박씨는 같은 건물 지하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극심한 한파로 보일러가 동파됐고 두 사람이 수리비 6만원을 절반씩 부담하며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열흘 뒤 박씨는 “수리를 마칠 때까지 당분간 수도를 잠그겠다”고 통보했다. 임차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동파사고가 발생했고 이 때문에 지하사무실에 누수까지 생겼다고 여긴 것이다. 정씨는 “동파에 대비하기 위해 출근할 때 보일러를 잠시 작동시켰고 잠들기 전에는 싱크대 수도를 틀어 물이 졸졸 흐르도록 했다”라며 “한파가 강력해 흐르는 물이 그대로 얼어버렸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집에서 당장 출근이 막막해진 정씨는 서울 소재 부모님 집으로 이사한 뒤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고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씨는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맞섰다. 계약 당시 정씨가 5~6개월 정도만 거주할 주택을 찾다가 2년짜리 계약을 체결했는데 공연히 동파를 빌미로 계약을 중도에 해지해달라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러면서 “겨울인데 매일 샤워를 할 필요가 없고, 봄이 되면 수리를 해줄 테니 2㎞ 떨어진 내 소유 아파트 욕실 한 칸을 사용하라”고 했다.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부동산 중개보수는 임차인이 부담하라고 덧붙였다. 견해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둘 사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정씨는 동파사고 이후 집주인이 수도를 잠가 집에 거주하지 못하는데도 보일러를 가동시키며 가스비를 부담했는데 집주인이 이렇게 나온다면 계약해지에 더해 손해배상도 요구하겠다며 변호사를 찾았다.

◇ 갈등해결의 첫 단계, 마주 앉기

동파사고가 난 지 두 달 만에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서 처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감정을 추스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사관으로 나선 홍보경 변호사는 두 사람의 날 선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조정은 양측 당사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이 왜 상했는지를 이해시키는 일이 먼저입니다.” 홍 변호사는 임대인에게 싱크대에 물을 틀어 놓았다가 얼음이 기둥모양으로 언 사진을 보여주며 동파를 막기 위해 임차인이 기울인 노력을 설명했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이 샤워하지 않고 거주하는 것이 힘들다는 점도 부연했다. 반대로 임차인에게는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별도의 자료를 통해 입증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알려주며 이 집에 머물지 않은 기간의 월세만 면제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만들었다.

2017년 5월 문을 연 조정위는 서울과 수원,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등 6개 도시에 설치돼 주택 관련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그래픽=김경진기자
2017년 5월 문을 연 조정위는 서울과 수원,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등 6개 도시에 설치돼 주택 관련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그래픽=김경진기자

갈등의 이유는 각기 달라도 갈등이 싹트는 과정은 꽤 보편적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단편 ‘불은 놔두면 끄지 못한다’를 통해 갈등이 얼마나 사소한 일에서 싹트는지, 작은 불화를 방치하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에서 정겨운 이웃이 원수가 되는 데에는 ‘우리 암탉이 옆집 마당에 알을 낳은 것 같다’는 의심 한 마디면 충분했다. 쌀쌀맞은 말과 울컥하게 만드는 대꾸가 오가며 이웃은 그동안 쌓아둔 앙금까지 모조리 끄집어냈다. 세대갈등과 계층갈등, 이념 갈등뿐 아니라 아이들 다툼에도 “법대로 하자”라며 목청을 높이는 오늘날 파편사회를 향해 한 세기 전 쓰인 고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갈등의 불씨를 오래 두면 결국 해를 입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진리다.

◇ 공감사회로 가는 상생실험, 조정

톨스토이 작품 제목이 일러주듯 불같이 화를 내고 상대를 향해 이를 간들 분노만 커질 뿐 갈등을 잠재울 수는 없다. 마주 앉아야 해법이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건일수록 각자 승소 전략을 짜와 법정에서 대결하는 소송보다 ‘조정’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한다. 재판 삼세판으로 끝내 대법관의 판단을 받아볼 때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내며 승률 50%의 재판에 매달리는 것보다 그 어느 쪽도 이기지 않으나, 역시 아무도 지지도 않는 조정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익하다는 설명이다.

20년간 판사로 일하며 수많은 사건의 승패를 가른 조병훈 서울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은 “조정이 바람직한 갈등 해결 방식”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분쟁을 살펴보면) 임대차관계나 건설관계, 동업자간이나 가족간의 분쟁은 장기화 경향을 띠는 일이 많습니다. 또 가족 간 분쟁처럼 상한 감정을 조기에 치유할 필요가 있는 분야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하게 조정을 필수적 전치절차로 하는 제도적 방안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솔직한 대화가 상대방의 처지와 의견을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기 때문이다.

“판사로 재직하며 수많은 판결을 선고했지만, 어느 한 편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사건이 무척 많았습니다. 판결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유한한 시간 내에 유한한 자료로 시비를 가리는 것이므로 늘 한계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조정제도는 상호 대면해 충분히 대화하고 호소할 기회를 주고 이해관계의 조절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나가니 재판 절차보다 훨씬 설득력과 만족감이 높은 제도입니다.”

그는 조정을 통해 합당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 “갈등 조정자로서 비록 당장 해결이 안 되더라도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줌으로써 당사자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의 실마리에 다가가게 해보자는 심정으로 접근합니다.” 감정이 치유되면 문제해결이 뒤따르더라는 오랜 경험에서 터득한 방식이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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