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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엔] “공임 올랐다고 좋아했는데…” 다시 거리로 내몰린 구두 장인

입력
2018.12.27 04:40
수정
2018.12.27 07:2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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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뷰엔 그 후 – 성수동 제화공 

[12월 24일] 서울 성수동의 한 수제화 공장에서 한 제화공이 저부(구두 밑부분)를 만들고 있다. 이 공장은 26일 문을 닫았다. 신발이 가득해야 할 선반은 폐업을 앞두고 일감이 소진되었기에 텅 비어 있다.
[12월 24일] 서울 성수동의 한 수제화 공장에서 한 제화공이 저부(구두 밑부분)를 만들고 있다. 이 공장은 26일 문을 닫았다. 신발이 가득해야 할 선반은 폐업을 앞두고 일감이 소진되었기에 텅 비어 있다.
[5월 23일] 위 사진과 같은 장소의 5월 모습. 분주한 제화공 옆으로 신발이 가득 놓인 선반이 보인다.
[5월 23일] 위 사진과 같은 장소의 5월 모습. 분주한 제화공 옆으로 신발이 가득 놓인 선반이 보인다.
[12월 24일] 갑피(구두 윗부분)를 만들기 위해 망치로 가죽을 두드리고 있는 제화공의 손. 엄지는 뭉툭하게 변형됐고 두 손엔 굳은살이 가득하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켜켜이 쌓인 노동의 흔적이다.
[12월 24일] 갑피(구두 윗부분)를 만들기 위해 망치로 가죽을 두드리고 있는 제화공의 손. 엄지는 뭉툭하게 변형됐고 두 손엔 굳은살이 가득하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켜켜이 쌓인 노동의 흔적이다.
[5월 23일] 경력 45년 저부 담당 제화공의 옹이진 손. 긴 세월 동안 반복된 고된 노동의 흔적이 휘고 비틀어진 손가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5월 23일] 경력 45년 저부 담당 제화공의 옹이진 손. 긴 세월 동안 반복된 고된 노동의 흔적이 휘고 비틀어진 손가락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낡은 건물 3층. 수제화를 생산하는 비좁은 공장에 들어서자 본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위질과 망치질로 분주한 20여명의 제화공 사이에서 누군가 맨밥에 김치를 올려 끼니를 때우고 있다. 이 공장은 26일 폐업했다. 이틀 뒤면 떠나야 하는 일터에서 이들은 30~40년 이어온 일상을 이렇게 반복하고 있었다.

제화공들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착잡한 마음마저 감추진 못했다. 43년 경력의 유병옥(62)씨는 “공임이 늘었다고 좋아했는데 공장이 문을 닫는다니 마음이 말이 아니지. 오늘 하는 일이 마지막 일이야. 다른 공장을 찾아봐야지…”라며 한숨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신발이 빼곡히 놓여 있어야 할 선반은 텅텅 비어 있다. 한 제화공은 “고용보험을 못 드니까 실업수당도 없고, 평생을 이것만 해서 다른 할 것도 없고… 이렇게 쫓겨나면 오갈 데가 없다”라고 말했다. 본사는 이 공장을 폐업하고 중국에서 새 공장을 가동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31일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성수동 제화공의 열악한 처우를 보도한 후 20년째 제자리던 공임이 인상됐지만 이들의 얼굴엔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그 사이 성수동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관련기사 ☞ “최저시급도 못 법니다” 40년 구두 장인의 옹이 손)

성수동 제화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보도한 5월 31일자 한국일보 지면.
성수동 제화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보도한 5월 31일자 한국일보 지면.
[12월 24일] 각종 도구로 가득한 이 작업대가 제화공이 가진 공간의 전부다. 이곳에서 일하고, 쉬고, 식사도 하며 수십년 제화 장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12월 24일] 각종 도구로 가득한 이 작업대가 제화공이 가진 공간의 전부다. 이곳에서 일하고, 쉬고, 식사도 하며 수십년 제화 장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21일 서울 성수역 인근에서 '제화노동자 노조할 권리보장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백화점 수수료 인하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21일 서울 성수역 인근에서 '제화노동자 노조할 권리보장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백화점 수수료 인하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정기만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지부장에 따르면 제화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약하게나마 처우 개선이 이루어졌다. 최소 10만원에서 30만원 이상 가는 수제화 한 켤레당 저부와 갑피 각 5,500원에 불과하던 공임은 500~1,500원가량 올랐고, 최근 제화공을 노동자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로 4대 보험 가입이나 못 받은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렸다. 노조에 가입한 125개 공장 중 26곳이 단체협약을 맺었고, 보도 당시 370명이던 조합원도 715명으로 늘었다. (관련기사 ☞ “제화社 도급 장인들도 근로자 퇴직금 줘야”)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영세한 하청 공장들은 4대 보험에 가입할 여건이 못 되고, 일부 업체는 공임을 다시 깎거나 아예 중국 공장으로 갈아탈 계산을 하고 있다. 제화공들은 이 같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과도한 판매 수수료와 마진율 등 제화 산업의 불합리한 구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종민 제화노조 조직차장은 “판매 수수료가 백화점 38%, 홈쇼핑은 41%에 달한다. 30만원짜리 구두 한 켤레를 팔면 각각 11만4,000원과 12만3,000원을 챙긴다. 그 다음 본사가 각종 비용과 이윤으로 14만~15만원을 가져가고 나면 하청 공장에 돌아가는 금액은 4만~5만원 선이다. 이 돈으로 재료비와 공장 운영비, 관리자 인건비, 업체 이윤, 공임까지 해결하다 보니 하청 사장들 입에서 ‘죽겠다’는 말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제화공들은 21일 열린 집회에서 판매 수수료 인하를 집중적으로 요구했다.

김 차장은 “판매 수수료를 5%만 내려도 숨통이 트일 텐데, 수제화 업체 대다수가 자체 유통망 없는 중소기업이다 보니 백화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TV홈쇼핑 상위 4개사에 대해 과다한 판매 수수료율 등에 대한 직권 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임 인상의 기쁨도 잠시, 또다시 거리에 나선 제화공들에게 올겨울 세밑 한파는 유난히 가혹하다.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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