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남북군사합의 발표 100일

입력
2018.12.26 04:40
30면

 9ㆍ19 이후 군사합의 착실 이행 불구 

 완전한 남북 평화체제 구축에는 미흡 

 북, 金 답방 등 신뢰구축 의지 보여야 

서양에는 전쟁이 끝나면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표현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전란 이후 창칼을 수거해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종을 만든 전례가 적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전쟁 중에 사용된 천하의 병기들을 녹여 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숙종은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그가 임진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조선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추구했다는 점을 평가해, 평화의 종을 만들어 일본에 기증했다.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일본 닛코(日光)는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안치한 사당이 있는 곳인데, 그 사당인 도쇼구(東照宮) 안뜰에 서 있는 종루에 바로 조선통신사들이 기증한 평화의 종이 지금도 걸려 있다.

지난 4월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 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양측이 군사적 긴장상태 완화와 전쟁위험 해소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합의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9월19일, 남북 국방장관이 평양에서 군사합의서를 발표했다. 이 군사합의서에서 남북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판문점 및 DMZ 일대를 평화지대화하며, 서해 해상을 평화수역으로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지속적으로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9ㆍ19 군사합의로부터 100여일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남북은 내외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합의사항들을 착실히 실행해 왔다고 본다. 유엔사령부와의 삼자 협의 아래 10월1일부터 판문점 구역 비무장화를 위한 지뢰제거 작업이 실시됐고, 이곳에 근무하는 남북 장병들은 더는 총기를 휴대하지 않게 됐다. DMZ 내 양측 GP 22개소가 파괴되거나 철거됐다.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도 지뢰제거 작업이 실시됐고, 내년부터는 6ㆍ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공동발굴하는 작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군사합의는 아니지만,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북한 철도 실사가 실시됐다. 그간 불신으로 점철돼 온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남북 군사 당국이 9ㆍ19 군사합의 사항들을 차질없이 추진하는 것은 나름 평가할 만 하다.

그럼에도 아직 남북간에 평화의 종을 울리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남북 정상 간에 합의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지연되고 있다. “완전한 비핵화”에 관한 북한의 실질적 조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내년 초로 연기된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내용의 합의가 나올 것인지도 미지수다. 안보 전문가들이나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북한이 핵능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남북의 군사합의를 진전시켜 한반도 평화상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보다 제도화된 신뢰 구축 노력이 필요하다. 냉전기에 서로 대립하던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도 상호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오랜 기간 서로 군사훈련을 통지하고 참관을 허용하는 등 공동안보의 노력을 기울였다. 유럽안보회의와 같은 공동의 국제제도를 창설해 그 안에서 양측 지도자들이 대화를 지속하며 불신감을 해소하려는 협력안보의 노력도 기울여 왔다.

남북 간에도 공동안보, 혹은 협력안보 방식에 따른 신뢰구축의 축적이 필요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와의 약속에 따라 한국에 대한 답방을 단행하는 것이 양측 신뢰구축 증진을 위한 좋은 시그널이 될 수 있다. 북한의 동계 군사훈련을 포함해 남북이 실시하는 군사훈련에 상호 참관을 허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협의해볼 수도 있다. 비무장화된 판문점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한반도 평화 관련 국제기구 등을 만들어 각각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평화 방안을 협의하는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발표될 북한 신년사에서 비핵화와 상호 신뢰 구축,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지가 어떻게 표명될지 궁금하다. 모처럼 찾아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계기를 북한 지도부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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