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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퀸을 부활시킨 ‘라이브 에이드’ 차려낸 밥 겔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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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대의 쇼가 아니다. 이건 ‘은하계’ 최대의 쇼다.”
19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 뜨겁게 작열하는 것은 한여름 땡볕뿐이 아니었다. 서로의 땀냄새를 뒤집어 쓴 채 ‘무아지경’으로 하나 된 7만 명의 아우성이 그랬고, 그들 모두를 ‘집단 환각’ 속으로 몰아넣은 무대 위의 퍼포먼스가 그랬다. U2, 데이빗 보위, 엘튼 존, 폴 매카트니, 그리고 마침내 여왕 ‘퀸(Queen)’이 그곳에 올랐을 때, 아마 그는 예감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이 쇼는 지구 역사상, 아니 은하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쇼가 되었다’는 사실을.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목소리는 황홀함에 떨렸다.
2018년 겨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730만 한국 관객의 가슴에 불을 댕기며 팝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여름을 완벽하게 소환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퀸이 선 보인 ‘전설의 25분’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장엄하게 되살아났다. 영화의 여운을 채 잊지 못한 나머지 유튜브에서 ‘Queen Live aid’를 검색해 본 이라면, 아마 불현듯 궁금해질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무려 40%에 달하는 20억 명의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진 이 거대한 쇼를 만든 건 누구였을까?
영화에도 힌트는 나온다. 딱 2번, 대략 10초 정도. 스타디움 뒤편의 상황실에서 전화 기부 현황을 들여다보다 별안간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지금 당장 전화하란 말이야!”라고 호통치는 어느 괴팍한 젊은이. 그가 바로 이 쇼를 ‘은하계 최대쇼’라 자화자찬한 라이브 에이드의 기획자, 밥 겔도프다. 한 때 런던의 뒷골목 한 켠에서 쓸쓸히 잠들던 노숙자, 불도저 운전사부터 공장 노동자까지 돈 되는 일이라면 험한 일도 가리지 않았던 그는, 어떻게 1970년대를 풍미한 아일랜드의 ‘록스타’에서 지상 최대의 자선 공연을 벌여 1억 5,000만 달러를 모은 ‘세기의 성자’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가난하고 외로웠던 떠돌이 청년
밥 겔도프는 1951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변두리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업사원이었고 어머니는 일곱 살 난 아들을 남겨 둔 채 세상을 떠났다. 가난은 지독했고, 누구도 소년을 돌보지 않았다. 어린 그를 키운 건 8할이 외로움. “낡고 텅 빈 집. 누이들도 없이 홀로 그 집을 지켜야 했던 밤들은 어둡고 쓸쓸했습니다. 한 번은 내가 일어설 힘 조차 없을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어요. 누나는 사흘이 지나서야 내가 위층에 있다는 걸 알아챘죠.” 어머니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철저히 ‘혼자’ 자랐다. 가난한 조국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지만, 변변한 학위 하나 없는 젊은이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길거리에 살았어요. 스펀지 매트리스 위에 침낭을 깔고 잠들었죠. 그도 안 되면 게트윅 공항을 어슬렁거렸고요.” 그렇게 청년 겔도프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선 주로 ‘몸’을 굴려 일했지만, 타고난 언변을 십분 살려 영어 교사나 음악 전문 기자로도 변신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잠시 뿐’이었다.
그가 운명적으로 밴드 ‘붐타운 랫츠’(The Boomtown Rats)를 만난 건 스물네 살이 되던 1975년.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었지만, 영업사원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덕인지 말주변 하나는 끝내줬다. 그렇게 ‘밴드 매니저’ 자리를 꿰찬 뒤, 리드 보컬이 기타리스트로 포지션을 옮기자마자 ‘프런트맨’이 되길 자처해 마이크까지 잡게 된다. 악기 실력이야 여전히 변변치 않았지만 노래는 근근이 써냈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고달팠던 인생사를 정성스레 녹여서. 붐타운 랫츠의 히트곡인 ‘Rat Trap’이 그의 대표적 작품. 더블린의 도살장에서 일했을 당시 만났던 한 사내를 모델로 한 이 노래는 ‘가난’이라는 덫에 걸려 출구 없이 절망하는 영국 청년 세대의 우울을 그려냈다. 또 다른 히트곡 ‘I don’t like Mondays’에선 미쳐가는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엽기적인 상황을, ‘Looking after number one’에선 권력에서 소외돼 가는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을 묘사했다. 푸르지 않은 ‘청춘(靑春)’이었던 그의 어두운 젊은 날을 말해주는 노래들이었다. 데뷔 3년 만에 영미 32개 도시 투어를 도는 등, 붐타운 랫츠는 쫓기듯 빠르게 정점을 찍었다. 영광은 길지 않았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는 자조가 밀려왔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가 바꾼 인생
“만약 그 날이 1984년이 아닌, 붐타운 랫츠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1979년의 어느 날이었다면, 나는 아마 그 뉴스를 결코 보지 못했을 겁니다. 언론도 레이블도 공연장에서도 더 이상 우리를 찾지 않던 어느 날,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갓난아기인 딸을 안은 채 BBC 저녁 뉴스를 틀었죠. 그때, 나는 남은 내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무려 3,000만 명. 그날 겔도프가 브라운관을 통해 본 것은 당장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는 3,000만 아프리카인들의 모습이었다.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둔 두 대륙의 운명은 극명히 갈렸다. 잉여 농산물이 넘쳐나던 영국에선 버리는 음식에도 세금을 매겼지만,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는 한 끼 음식이 없어 사람이 죽었다. “저 부모들과 아이들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당장 기부함에 1파운드를 넣는 정도로는 절대 해결이 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요.” 자신이 가난의 품에서 자라왔던 만큼, 가난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그들의 처참한 현실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뭐라도 하기 위해선 일단 ‘돈’을 만들어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에게 팔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제 손으로 만든 ‘노래’뿐, 그것이 바로 ‘밴드 에이드(Band aid)’와 ‘라이브 에이드(Live aid)’의 시작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팝 음악계의 최전선에 있었던 베테랑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제작한 싱글 앨범 ‘Do they know It’s Christmas?’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무려 300만 장씩이나. 그도 그럴 것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영국의 로커들이 대거 ‘밴드 에이드’의 멤버로 참여했다. 이제 막 유명세를 떨치며 급부상 중이었던 밴드 ‘U2’의 보컬 보노는 물론이거니와, 스팅, 필 콜린즈, 조지 마이클 같은 슈퍼스타들이 목소리를 보탰다. 이 41명의 ‘대규모 록 합창단’의 이름은 바로 밴드 에이드. 응급처치용 반창고 이름에서 따온 재치 있는 작명이었다. 예상 모금액 7만 파운드의 100배를 뛰어넘는 800만 파운드가 모였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기 위해 그곳에 가야 했죠. 아프리카를 다녀와 기금 운영 조직 ‘밴드 에이드 트러스트(Band Aid Trust)’를 세웠습니다. 사립 구호 대행사의 손에서 그 값진 돈들이 마구 새 나가지 않을 수 있게 말이죠.”
밴드 에이드가 몰고 온 폭풍은 대단했다. 영국 가수들의 활약을 손 놓고 구경만 할 수 없었던 미국 가수들도 따라 나섰다. 밴드 에이드 컨셉트를 그대로 본 딴 ‘USA for Africa’가 결성된 것. 여기서 ‘USA’는 ‘United States of America’(미합중국)이 아닌 ‘United Support of Artists’(아티스트 연합)’의 약자다. 마이클 잭슨이 작곡에 참여하고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을 맡아 만들어진 싱글은 발매되자마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기 차트 정상에 오른다. 라디오 방송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전 세계에 끊임없이 울려 퍼진 이 노래는 영국의 기록을 넘어 7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팝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래 ‘We are the world’다.
◇전세계가 기부에 동참할 뭔가 다른 일이…
“밴드 에이드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어요. 음반 판매 수익금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니. 전 세계 인구가 파운드, 프랑, 루블, 달러를 들고 전화기에 매달리게 할 방법은 없을까. ‘뭔가’ 다른 일이 필요했죠.” 1985년 6월 10일, 밥 겔도프는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J.F Kennedy 스타디움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초대형 자선기금 마련 콘서트 계획을 발표한다. 선공개된 60여 명의 출연진 라인업은 전 세계 팝 팬들의 두 눈을 의심하게 했다. 7만 명을 수용하는 런던 웸블리의 티켓은 2시간 만에 동이 났고, 미국 주요 도시에 판매된 J.F.K의 티켓도 사정은 마찬가지. 팝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7월 13일, ‘라이브 에이드’의 막이 올랐다.
폴 매카트니, 밥 딜런, 데이빗 보위, 퀸, 마돈나, 브라이언 아담스, 레드 재플린, 롤링 스톤스, 듀란듀란까지…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빠짐없이 등장한 이 날의 공연은 14대의 카메라로 촬영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위성 생중계됐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15억 명을 찍었던 시청기록을 깨트렸다. 150여 개국 20억 명의 시민이 라이브 에이드와 함께였다. 소련과 중국, 폴란드나 체코와 같은 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도 방영됐을 정도.(국내에서는 MBC가 하루가 지난 7월 14일 밤에 녹화방송을 했다. 당시 금지곡이었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공연은 편집됐다.) BBC로 연결된 300대의 회선으로는 기부 전화가 빗발쳤다. 공연 직후에만 5,000만 파운드가 모였고, 이후 이어진 모금액까지 합치면 총 1억 5,000만 파운드. 사실상 라이브 에이드는 ‘위대한 쇼’이기 이전에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지상 최대의 ‘자선 프로젝트’였다.
1985년 7월 13일을 ‘전설’로 만든 주인공은 단연 퀸이었다. 오죽하면 밥 겔도프와 엘튼 존이 “그들이 쇼를 훔쳤다(They stole the show)”라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을까.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 날의 퀸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라이브 에이드’를 완벽 재현했다. 스탠딩 존을 한껏 달군 열기에 웃통을 벗어 던져버린 관객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등을 탄 채로 절규하듯 ‘에오!’를 외쳤다. “나는 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전설이 될 것이다”라고 했던 머큐리의 말마따나 이날, 그들은 과연 전설이 됐다.
라이브 에이드의 무대를 사로잡은 뮤지션이 퀸뿐이었을까. 영국에선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지만 세계 무대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일랜드 밴드 U2는 이날 눈부신 라이브 실력을 선보이며 존재감을 각인했고, 무명 시절에 찍은 누드사진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마돈나는 보란 듯이 자신감 넘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1980년 드러머 존 보냄의 사망으로 해체했던 레드 재플린은 이 날을 계기로 재결합했고, ‘Against all odds’로 널리 알려진 필 콜린즈는 영국에서 공연한 직후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같은 날 동시에 진행된 두 무대에 모두 올랐다.
대망의 피날레는 데이빗 보위의 무대였다. 그는 대표곡 ‘Heroes’를 자신의 아들과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세계인을 향해 노래했다. ‘나는 왕이 될 거야(I, I will be king) 너는 여왕이 되겠지(And you, you will be queen), 우리는 그렇게 언젠가 영웅이 될 거야(We can be Heroes).’ 스타디움의 커다란 전광판에서 죽음 직전의 모습이 공개됐던 아프리카 소녀 ‘울두’는 20년 뒤인 2005년, 밥 겔도프의 주도로 열린 ‘라이브 8’ 무대에 건강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올랐다. 보위의 노래에 응답이라도 하듯 말이다. 한편, 스스로를 ‘보위 예찬론자’라 칭했던 겔도프는 공연의 엔딩이었던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무대에서 보위와 나란히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음악 인생 내내 동경해왔던 우상을 자신이 만든 ‘지상 최대’의 쇼에 세운 그야말로 그날의 ‘숨은 영웅’이 아니었을까.
◇‘라이브 에이드’는 음악이 할 수 있는 최선
1985년 ‘라이브 에이드’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선 별별 ‘에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69년 미국에서 열렸던 록 페스티벌 ‘우드스톡’ 또한 평화와 반전을 노래했지만, 도피성 이상주의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반면, ‘라이브 에이드’는 ‘음악이 실제로 무엇을 가능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같은 해에 밥 딜런, 닐 영을 비롯한 미국 음악인들은 어려움에 빠진 농민들을 돕기 위해 ‘팜 에이드(Farm Aid)’를 개최했고, 1999년 10월엔 빈민 돕기 기금 마련을 위해 본 조비 등의 톱 스타 공연을 인터넷으로 생중계 하는 ‘넷 에이드(Net Aid)’가 열렸다. 밥 겔도프 자신이 라이브 에이드로 시작된 ‘자선공연’의 계보를 잇기도 했다. 그는 2005년, 스코틀랜드 글렌이글스에서 열릴 G8 정상회의를 앞두고 참가국들의 아프리카 원조를 촉구하기 위해 대규모 콘서트 ‘라이브 8’을 열었다. 원조 의무를 져버린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공개적으로 신랄한 비판을 쏟아 붓기도 했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듯, 밥 겔도프가 훌륭한 취지로 모은 이 천문학적인 돈들이 과연 아프리카를 제대로 도운 것이 맞느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기금의 상당 부분이 기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쓰인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부패 정부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탓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구호 물품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 나머지 ‘자생 불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는 해석까지 나온다. 밥 겔도프는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성자’라는 별명을 원한 적이 없다. 제스처뿐인 자선 운동에 참가할 마음도 없거니와, 그런 적도 없다”며 이런 비판들을 일축했다. 그는 늘 “라이브 에이드야말로 팝계가 할 수 있는 최종적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개인적 삶은 비극 그 자체였다. 텔레비전 쇼 진행자였던 아내 폴라 예이츠는 약물 중독으로 2000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끼를 빼닮아 모델로 활동했던 둘째 딸 피치스 겔도프 또한 2014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라이브 에이드’ 이후 그가 몸 담았던 밴드 붐타운 랫츠는 본격적인 하락세를 타기 시작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를 여전히 ‘낙관 신봉자’라 부른다.
“’라이브 에이드’의 계보를 이어받아 ‘라이브 8’을 만들었듯, 언젠가 또다시 위대한 쇼를 할 날이 분명히 올 겁니다. 목표가 분명한 이들은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여기에 도착할 수 있었어. 그다음은 바로 저기, 또 그다음엔 더 멀리까지 닿을 수 있을 거야’라고요. 목표가 없다면 무서운 냉소를 품을 수밖에 없어요. 정치는 그런 냉소를 허용치 않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낙관이 빚은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2010년엔 아이티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USA for Africa’가 재결성돼 저스틴 비버ㆍ어셔 등의 팝스타들이 ‘We are world’를 다시 불렀다. 2014년엔 아프리카 에볼라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2세대 ‘밴드 에이드’(콜드 플레이ㆍ에드 시런ㆍU2의 보컬 보노 등이 참여)가 등장하기도 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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