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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칼럼] 한국과 일본의 미들파워 협력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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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외교ㆍ군사적 기준상 같은 중견국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주변국 협조 필수
민주주의 가치 공유하는 日과 협력해야
책을 읽을 때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진가가 느껴지는 저작들이 있다. 필자의 경우 2005년에 출간된 일본 게이오대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 교수의 저술 ‘일본의 미들파워 외교’가 그런 저작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캐나다, 호주 등과 같은 미들파워 국가로 보고, 일본이 지향해야 할 외교정책의 방향을 경제력이나 과학기술력을 활용한 경제개발 협력과 국제평화활동 지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같은 미들파워의 위상을 갖춘 한국과 일본이 국제적 협력을 추진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필자는 우선 일본을 미들파워로 규정하는 소에야 교수의 주장에 저항감을 느꼈다. 직접 소에야 교수와 가졌던 학술토론에서도 과연 일본을 경제력이나 군사비 기준에서 대국이 아닌 미들파워로 보는 인식이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 날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한 비판이 일본 내 집권 여당이나 외무성에서도 나올 만큼 일본 미들파워론에 불만을 드러내는 정치인, 외교관이 적지 않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 대한 관찰을 계속해보니 소에야 교수가 말한 일본 미들파워론이 오히려 실제에 가까운 학문적 주장이 아닌가 생각됐다. 국제질서상 강대국은 외교적으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점하면서 국제문제 현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들이 포함될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NPT 체제 아래서 핵무기의 보유가 인정된 다섯 국가들이 해당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외교적ㆍ군사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로 일치한다.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에 준하는 국력을 가진 나라들이 중견국, 혹은 미들파워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G20에 속한 한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이 미들파워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된 필자는 새삼 소에야 교수의 견해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가 제시한 한국과 일본 간의 미들파워 협력론도 현실적으로나 당위성 측면에서 국제질서의 현실에 부합되는 정책론이 아닌가 생각됐다.
실은 소에야 교수가 이 책을 발간하기 전에 한국과 일본의 공통성을 발견하고 양국간 상호협력과 글로벌 협력의 비전을 제시한 정치가들이 존재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수상이 선언한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이 그러하다. 이 선언에서 양국 정상은 한국과 일본이 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정치, 경제, 안보, 사회문화 분야에서 미래지향적 협력을 증진키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20여년 전부터 왕성하게 제기된 한국과 일본의 미들파워 협력론은 오늘날 양국에서 접하기 힘든 담론이 되고 있다. 일본 국내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소에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이 책의 개정판에서 미들파워 표현을 아예 제목에서 삭제했다. 한국 내에서도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결정 등에 따라 한일간 협력 필요성을 운위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북한 비핵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한국의 국가전략적 과제들의 구현을 위해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경제적, 안보적 동질성을 공유하면서 긴밀히 협조할 수 있는 일본과 갈등 현안만 누적되는 것이 과연 우리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20년 전인 1998년 10월, 일본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일 양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아시아 지역의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 공동노력을 하자고 역설했다.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동질성을 갖는 이웃 국가들과 공동 협력을 증진하는 미들파워 외교가 지금 한국에게 절실히 요망되는 과제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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