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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슈] “나는 개였고 소였다” 검찰총장 울린 ‘그 때 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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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슈]는 ‘모아보는 이슈’의 준말로, 한국일보가 화제가 된 뉴스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기사입니다.
31년 전의 정치적 격변과 관련해 우리 국민들은 ‘거대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됩니다. 영화 ‘1987’이 그렸던 것처럼 국가란 무엇이고, 시민의 힘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많은 이들이 질문 앞에 섰습니다.
그 1987년의 또 다른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에 접근하려면 조금 다른 질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국가는 그 잔인성을 얼마나 증폭시킬 수 있는가’, 더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같은 것들이죠.
513명 이상이 감금, 성폭행 등을 당하고 구타와 굶주림 등으로 숨진 사건. 지금도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의 디테일은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건. 그런데 부산시장이, 그리고 사정 권력의 최 정점이라는 검찰총장이 30년이 지나서 사죄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요.
‘꿩’ 대신 ‘진실’
1986년 12월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에서 근무 중이던 김용원 검사는 경남 울주군 숲 속으로 꿩을 잡으러 나갔다가 허탕을 칩니다. 대신 거대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실마리를 잡게 됩니다.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김용원 검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꿩잡이 안내인의 ‘말 한마디’가 시작이 됐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작업장이 있는데 경비원 수십 명이 몽둥이로 인부들을 때린다는, 언뜻 믿기지 않는 말이었죠. 울산군 청양면 삼정리 산 100번지. 그곳은 부산에 근거지를 둔 형제복지원이 자동차 운전교습소를 건설하던 곳이었습니다. 내사 끝에 1987년 1월 덮친 건설 현장에서는 형제복지원 원생 180여명이 강제로 수용 당한 상태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강제 노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용자 등을 대상 조사를 벌인 결과, 1986년 7월 건설현장을 탈출하려던 김계원(당시 40세)씨가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해 숨진 후 암매장됐고 사인은 ‘신부전증’으로 조작돼 은폐됐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검찰의 수사는 자연스럽게 부산 북구 주례동의 형제복지원으로 향했고, 1975년부터 1986년까지 확인 된 것만 513명이 김계원씨와 비슷한 이유로 숨진 것으로 드러납니다.
12년 가까이 운영된 형제복지원의 1986년 말 기준 수용자는 3,128명.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형제복지원은 실존하는 ‘지옥’에 비교됐습니다. 새벽 5시쯤 기상, 꽁보리밥과 썩은 젓갈로 끼니를 때웠으며, 밥을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매일 10시간 이상 진행됐던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때로는 수용자들을 감시하는 조장이나 소대장, 중대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이 이뤄졌고 사망자가 속출했습니다. 동성간ㆍ이성간 성폭력도 빈번하게 자행됐습니다. 꿇어 앉은 채로 잠을 재우거나 ‘원산폭격’ 같은 기합을 주고 수용자가 수용자를 폭행하도록 하는 가혹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배고픔을 못 이겨 쥐나 지네를 잡아 먹었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형제복지원 관계자뿐만 아니라 수용자들 사이에서 선발된 조장, 소대장 등도 가해자였습니다. 복지원 운영진의 지시에 불응하면 조장이나 소대장도 다시 강제 노역과 폭력에 시달리는 일반 수용자가 됐다고 합니다.
수용자들에 대한 감금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현 안전행정부)의 훈령에 따라 ‘합법화’됐습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을 위해 부랑인ㆍ장애인ㆍ고아 등을 별다른 절차 없이 수용시설에 감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형제복지원에는 엄마의 심부름을 나갔던 아이, 친척집에 놀러 갔던 소녀, 하교하던 학생, 공원에서 쉬던 행인 등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사실상 납치ㆍ감금 됐습니다.
그리고 이 ‘지옥’의 꼭대기에서 형제복지원을 관장했던 이는 박인근 원장이었습니다.
부산시장 “박 원장 석방해 달라” 그리고 징역 2년 6개월
수사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김용원 검사의 AP 통신 인터뷰 등에 따르면 김 검사는 박인근 원장을 구속한 직후 김주호 당시 부산시장으로부터 박 원장을 석방해 달라는 전화 청탁을 받습니다. 거절했지만 그 전화 한 통은 이후 수사 과정의 난항을 예고합니다.
수사와 재판이 한창 진행된 때는 1987년 6월, 바로 그 6월 항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앞둔 정권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상황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훗날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돈봉투’ 사건에 연루됐던 당시 박희태 부산지검장을 비롯해 직속 차장 검사 등 검찰 내부에서도 사건을 축소하려는 압력이 거셌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1심에서 검찰은 특수감금, 보조금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박인근 원장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6억8,000여 만원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징역 10년에 벌금 6억8,000여 만원을 선고합니다. 2심에서는 징역 4년으로 형량이 줄었지만, 그나마 특수감금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로 판단합니다. 당시 재판장은 훗날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던 김용준 전 대법관이었습니다. 울주 작업장은 적법한 형제복지원의 시설로 볼 수 있으며 감금 조치 등은 ‘사회적 상당성’이 인정된다는 취지였습니다. 징역 2년6개월이 확정된 박인근 원장은 1989년 7월 20일 출소합니다.
1987년 이후에도 형제복지원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5년 7월 24일 부산 정신요양원에서 요양 중이던 박모씨가 극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망하기 8년 전,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조현병 증세를 보인다는 이유로 이송됐습니다. 박씨가 세상을 떠나고 한달 뒤 같은 정신요양원 환자가 스스로 생을 달리했습니다. 그 역시 1984년 형제복지원에서 이송된 이력이 있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상당수의 수용자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웠습니다.
‘거지와 부랑자를 소탕한 복지 사업가’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접 훈장을 받기도 했던 박인근 원장은 ‘명망가’였습니다. 출소 후에도 형제복지원의 이름을 바꾼 채 운영을 이어갔습니다. 훗날 부산시의 특별 감사를 통해 지원금 18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지만 처벌은 없었습니다. 뇌출혈로 거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았고, 공범인 아들만 처벌 받습니다. 당시 부산시 조사에 따르면 박인근 원장의 법인 재산은 1965년 111만원에서 정부의 복지원 부지 지원 등에 힘입어 2014년 220억원대로 불어났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빼돌린 것까지 합해 재산이 1,000억원대에 이른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지병을 앓던 박인근 원장은 지난 2016년 85세의 나이로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진실 규명은 다시 피해자의 몫
수사와 재판이 부침을 겪은 사이 ‘격동의 터널’을 지나온 한국 사회에 형제복지원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한종선씨의 국회 1인 시위를 통해서였습니다. 2013년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면서 진상 규명 작업이 본격화합니다.
이어 2014년 2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안전행정부와 보건복지부, 부산시 등이 대책위와 회의를 갖고 진상 규명 작업을 시작했지만 사실상 성과는 없었습니다.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특별법 없이는 정부가 나서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1987년부터 1988년까지 2년간 형제복지원 출신 무연고 시신 38구가 부산시립공원묘지에 가매장 됐다는 사실이 2014년 3월 추가로 밝혀집니다. 박인근 원장이 수사와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피해자가 계속 발생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존재했던 것이죠.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가 이어질 무렵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김용익 진선미 진성준 의원 등이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법률안을 발의합니다. 그러나 19대 국회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폐기됩니다. 20대 국회에서 지금은 여성가족부 장관이 된 진선미 의원이 다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을 발의했지만 아직 통과 소식은 없습니다.
그 동안에도 피해자들은 국토대장정과 국회 앞 천막 농성을 이어가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그들이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한 지도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피해자 한종선씨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던 ‘한겨레’와의 2013년 인터뷰에서 “나는 기초수급자가 돼 전전긍긍하며 사는데 저 인간(박인근)은 잘 살더라. 너무 화가 났다. 싸이코패스가 이렇게 생기는구나.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릴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함께 ‘지옥’을 경험하고 훗날 정신병원에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러나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버지와 누나의 사연을 털어 놓은 후 뱉은 말이었습니다.
사과와 남은 질문들
국가의 구체적인 응답이 돌아오기 시작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검찰과거사위원회가 꾸려지면서였습니다.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됐고 지난 7월 행정안전부는 전두환 정권 시절 박인근 원장이 받았던 서훈을 취소합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비상상고를 결정합니다. 1989년 대법원에서 확정된 형제복지원 사건의 판결에 법령 위반 소지가 있는 만큼 대법원이 다시 살펴봐 달라고 하는, 검찰총장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9월에는 오거돈 현 부산시장이 당시 시의 책임을 인정하며 사과를 합니다. 이어 11월 27일 문무일 총장도 피해자들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눈물을 쏟으며 “검찰이 외압에 굴복해 수사를 조기에 종결하고 말았다는 과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박인근 원장을 고작 2년여만에 사회로 다시 내보낸 법원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재판이 다시 시작되고, 또 혹시 국회가 특별법을 통과시킨다면, 정말 변화가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1975년부터 공권력이 부추겼던 ‘잔혹극’의 피해는 어떤 방법으로도 완전히 회복되긴 불가능할테지요.
그리고 또, 어쩌면 가장 무거울 수도 있는 질문이 아직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1982년 10월 일간지에는 당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화제의 드라마’가 자주 언급됐습니다. ‘사회 규범을 무시하고 비뚤어진 채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부랑아’들을 선도하는 박인근 원장의 ‘실화’를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극이니 각색했다고 해도, 우리 언론은, 시청자들은 정말 아무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1992년 부산시는 일선 자치구의 허가를 통해 행려자 시체 등을 지역 의과대학 연구용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합니다. 부산시는 1982~85년 30구의 무연고 시신을 의학교육용으로 ‘교부’했지만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 중단되면서 의과대학 측의 민원이 잇따랐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그렇게 사회에 ‘기여’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지원 노역 당시 수용자 2명이 감시를 피해 달아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감시원 10여명이 눈에 살기를 띠고 뒤쫓아 가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1993년 울주군 주민 최모씨의 연합뉴스 인터뷰)
‘행색이 초라했던’ 행인, 아이들, 이웃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전국 곳곳의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학대를 당하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울주군 주민 최씨뿐이었을까요. 혹시라도 우리들 마음 한 켠에 “인권에도 우선 순위가 있다”는 인식이 깊게 뿌리내린 건 아닐까요.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책 ‘살아남은 아이’ 중)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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