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인물 360°] 소녀상 일으켜 세우고 기억을 새기고 “미안해하지 않을래요”

입력
2018.11.24 14:00
구독

 이화여고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학생들 

19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에서 만난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학생들.(아래 사진) 왼쪽부터 16기 부회장 김은솔(20), 20기 부원 김민지(16), 19기 회장 이나연(17), 16기 회장 권영서(20), 19기 부회장 박규림(17), 성환철 교사(42). '주먹도끼'란 이름은 잘못된 역사를 베어내고 올바른 역사를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다. 위 사진은 학생들이 전국 239개 학교로 보낸 작은 소녀상. 박지윤 기자
19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에서 만난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학생들.(아래 사진) 왼쪽부터 16기 부회장 김은솔(20), 20기 부원 김민지(16), 19기 회장 이나연(17), 16기 회장 권영서(20), 19기 부회장 박규림(17), 성환철 교사(42). '주먹도끼'란 이름은 잘못된 역사를 베어내고 올바른 역사를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다. 위 사진은 학생들이 전국 239개 학교로 보낸 작은 소녀상. 박지윤 기자

거칠게 잘려 나간 댕기 머리, 굳게 다문 입술과 힘껏 쥔 주먹. 끝내 이 차가운 땅에 온전히 내려앉지 못한 두 발. 주한 일본 대사관을 향해 앉은 소녀상의 모습은 뜯어볼수록 서늘하다. 짧은 머리카락은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된 삶을,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이 땅에 돌아와서도 ‘환향녀’ 취급을 받으며 떠돌아야만 했던 날들을 상징한다. 비겁한 침묵을 소리 없이 마주해 온 소녀상의 뒷모습은 그렇게 늘 외로웠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같은 소녀들이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두 발을 땅 위로 내딛고 바로 선 소녀상은, 꾹 모아 쥐었던 두 손을 활짝 펼쳤다. 한 손은 세상에 힘껏 악수를 청하고, 또 다른 한 손은 커다란 나비를 날려 보내며. 2015년 11월,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 등장한 이 소녀상은 이화여고 역사동아리 ‘주먹도끼’ 학생들이 전국 53개 고교 1만6000여 명의 학생들의 마음을 모아 세웠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전국 초ㆍ중ㆍ고 학교엔 239개의 ‘작은 소녀상’이 세워졌다. 같은 동아리 후배들의 작품이었다.

이화여고 학생들이 지난 2015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 세운 소녀상의 모습.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학생들은 털장갑과 목도리, 귀마개로 소녀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김은솔씨 제공
이화여고 학생들이 지난 2015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 세운 소녀상의 모습.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학생들은 털장갑과 목도리, 귀마개로 소녀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김은솔씨 제공

“학생이면 공부나 할 것이지 주제넘는다, 뭘 안다고 나서느냐, 대학 가려고 하는 일인걸 모를 것 같으냐… 박수보다 비아냥이 앞섰던 순간들도 많고요. 소녀상은 이미 다 만들어 놨는데, 번번이 ‘안 된다’ ‘못한다’ 어른들 반대에 부딪혀 발만 동동 굴렀던 적도 있어요.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 일단 해보자.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란 생각으로 시작했던 게 3년 전인데, 여기까지 왔네요.” (16기 회장 권영서(20)) 지난 3일, 선배들이 소녀상을 올린 바로 그 자리에, 이번엔 후배들이 국내외 위안부 할머니 259분의 이름과 일본군에 끌려갈 당시 나이를 새긴 기억의 동판을 새겼다. 1997년 독일의 한 예술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태인과 소수자들의 이름을 거리의 블록에 새겨 넣은 ‘걸림돌 프로젝트’를 본뜬 것이다.

큰 소녀상이 239개의 작은 소녀상으로, 또 259개의 기억의 동판으로... ‘잊지 않으려는’ 소녀들의 고군분투가 이어지는 동안 쉰 다섯 분(2015년 1월)이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스물일곱(2018년 11월)분만 남으셨다. “수요집회에 갈 때마다 할머님들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껴요. 자꾸 초조하죠. 그래서 재차 스스로 묻게 돼요.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최선을 다해야 할까.“(19기 부회장 박규림(17)) 지금은 대학생이 된 이화여고 역사 동아리 ‘주먹도끼’ 선배들과 그 뒤를 잇고 있는 후배들, 10년째 이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성환철 지도교사를 지난 19일 서울 정동 이화여고에서 만났다.

2015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11차 수요집회'에 참여한 이화여고 주먹도끼 학생들이 공연을 마치고 손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당시 집회는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기 위해 열렸다. 홍인기 기자
2015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11차 수요집회'에 참여한 이화여고 주먹도끼 학생들이 공연을 마치고 손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 당시 집회는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기 위해 열렸다. 홍인기 기자

 ◇처음 나간 수요집회… 가슴이 먼저 끓었다 

“만약 저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냥 교과서로, 책으로, 영화로만 접했다면 ‘우리가 나서서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까진 미처 못했을 것 같아요. 우리에겐 머리로 헤아리기 전에 가슴이 먼저 끓었던 경험이 있어요. 2014년 여름방학,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수요집회 현장에 처음 나갔을 때였죠.”(권영서) 아이들의 고운 손을 맞잡은 할머니들은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고마워, 참말로 고마워.’ “할머님들은 저희처럼 어린 학생들이 당신의 아픔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가장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했다. ‘고맙다’는 그 한마디에 이토록 가슴이 욱신욱신 저며오는 이유는 뭘까.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죄송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할머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2014년, 주먹도끼 학생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플래시몹 퍼포먼스를 벌였다. 학생들이 노란색 도화지를 들고 리본 모양으로 서서 노란 배를 접은 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나가는 퍼포먼스였다. 권영서ㆍ김은솔씨 제공
2014년, 주먹도끼 학생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플래시몹 퍼포먼스를 벌였다. 학생들이 노란색 도화지를 들고 리본 모양으로 서서 노란 배를 접은 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나가는 퍼포먼스였다. 권영서ㆍ김은솔씨 제공

마음이 끓자 손발이 움직였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세월호 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014년엔 ‘Remember 0416’이 새겨진 배지를 나눠주고, 노란 리본을 형상화하는 플래시몹도 벌였어요. 학생들끼리 릴레이 지지 선언을 하기도 했고요.”(김은솔) ‘스스로’ 나서 일을 벌였던 이때의 경험들이 축적돼 ‘우리 손으로 직접 소녀상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에까지 닿았다. 2014년 이전까지만 해도, 방학마다 떠나는 ‘정기 답사’ 정도가 활동의 전부였던 동아리였다. “생각해보니 마침 이듬해가 광복 70주년이기도 했어요. ‘명색이 역사 동아리인데, 우리가 손 놓고 있는 게 말이 돼?’ 수요집회에서 한꺼번에 각성한 친구들이 일제히 뜻을 모았죠.”(권영서)

2015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당시 이화여고 주먹도끼 학생들은 전국 고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소녀상을 세웠다. 소녀상을 제작한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와 주먹도끼 학생들, 그리고 성환철 선생님. 주먹도끼 제공
2015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당시 이화여고 주먹도끼 학생들은 전국 고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소녀상을 세웠다. 소녀상을 제작한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와 주먹도끼 학생들, 그리고 성환철 선생님. 주먹도끼 제공

 ◇여기도 ‘안 된다’ 저기도 ‘안 된다’ 상식과 달랐던 세상 

다짐은 호기로웠으나, 막상 소매를 걷어붙이니 막막했다. “이름 석자만 아는 소녀상 작가 부부께 무작정 연락을 드렸어요. 그렇게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를 만났는데, 줄곧 걱정이었던 비용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무조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권영서) 160㎝ 크기의 소녀상을 동으로 제작한다면 비용은 수천 만원을 호가했다. 하지만 당시 직접 만든 배지와 걸개그림을 팔아 한 푼 두 푼 모은 돈은 고작 400만원. “’돈을 마련하는 데 얼마나 걸리던, 그런 건 상관이 없다. 끝까지 도와줄 테니 한번 해 봐’라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사정을 생각해 원래 제작 비용의 1/3 정도로 줄여주셨고요.”

2015년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소녀상 제작 당시 주먹도끼 학생들은 기금 마련을 위해 굿즈를 판매했다. 성환철 선생님 제공
2015년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소녀상 제작 당시 주먹도끼 학생들은 기금 마련을 위해 굿즈를 판매했다. 성환철 선생님 제공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공부할 시간을 쪼개고, 밥 먹는 시간까지 쥐어짜며 백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틈이 날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학교 안팎을 누비며 ‘굿즈’를 팔았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판매 장부라도 정리할라 치면, 학원이든 야자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했다. 성적은 자연스레 하향곡선을 그렸다. 어느 날은 문득 눈물이 났다. ‘쌤, 저 공부는 언제 하죠?’ 불안한 마음이 밀려오자 선생님을 찾아가 엉엉 울었다. “요즘 고등학생들 스케줄 아시잖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틈이 없는 거. 가외 시간이라는 게 없는 애들인데, 없는 시간을 쥐어짜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잠을 아끼다 보면, 수업시간에 막 졸음이 덮치고…”(성환철 선생님) 세간의 시선처럼 정말 대학 입시가 최우선이었다면 감내할 수 없을 시간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소녀상이 제법 모습을 갖춰갈 무렵,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덮쳤다. “일단 소녀상을 만들기만 하면 어디든 세울 곳은 많다고 생각했어요. 부지를 마련하는 게 그토록 어려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런데 웬걸,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죠.” 학교 밖 어른들은 선생님 같지 않았다. 어딜 가든 차가웠고, 무심했다. “미술관에서도 대사관에서도 ‘안 된다’ 단칼에 거절당했어요. 관계자 한번 만나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 줄 꿈에도 몰랐죠. 이제야 힘들게 다 만들었는데,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정작 세울 곳이 없다니. 맥이 탁 풀리면서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학교 울타리 너머의 세상은 ‘선한 의도’조차 오롯이 환영받지 못하는 비뚤어진 곳이란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프란치스코 회관으로부터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 무사히 소녀상을 세우긴 했지만, 그 때 느꼈죠. 할머님들이 이토록 긴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세상이 우리의 상식과 달라서라는 걸요.”

2015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소녀상 제막식 당시, 16기 회장이었던 권영서(왼쪽ㆍ당시 17)씨가 벅찬 표정을 짓고 있다. 성환철 선생님 제공
2015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소녀상 제막식 당시, 16기 회장이었던 권영서(왼쪽ㆍ당시 17)씨가 벅찬 표정을 짓고 있다. 성환철 선생님 제공

 ◇산골에도 제주에도 자리잡은 ‘작은 소녀상’ 

2015년 11월 3일, 학생 독립의 날을 맞아 진행한 소녀상 제막식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의 온기로 마냥 포근했다. 두발로 일어서 오른손은 악수를 청하듯 앞으로, 왼손은 나비를 얹은 채 위로 뻗은 소녀상의 모습은 주먹도끼 학생들이 직접 고안해 낸 것이었다. “그저 꿈을 꾸는 것 같더라고요. ‘될까? 되겠어? 우리가 정말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그 소녀상이 눈 앞에 있으니… 막 벅차 오르는 거예요.”(권영서)

그러나 꼬박 1년을 들여 세운 소녀상의 황홀한 성취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들려온 12ㆍ28 위안부 합의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이들이 정말 힘들고 어렵게 이뤄낸 것들이 한 순간에 쓸모를 잃어버린 순간이었죠.”(성환철) 2015년 마지막 수요집회에 나간 주먹도끼 학생들은 좌절과 분노로 힘껏 핏대를 올렸다.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오기가 생기기도 했어요. 우리가 만든 소녀상이 큰 주목을 받았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거든요. 우리가 다시 움직인다면, 상당한 존재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죠.”

2016년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 1년을 맞아 이화여고 학생들은 교내에서 벌인 릴레이 반대 선언을 벌였다.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중학생이었던 19기 박규림(17)양과 이나연(17)양은 이 소식을 듣고 역사 동아리 활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주먹도끼 제공
2016년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 1년을 맞아 이화여고 학생들은 교내에서 벌인 릴레이 반대 선언을 벌였다. 12ㆍ28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중학생이었던 19기 박규림(17)양과 이나연(17)양은 이 소식을 듣고 역사 동아리 활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주먹도끼 제공

그렇게 2016년 봄 시작된 ‘작은 소녀상 프로젝트’는 전국 100개 학교에 가로, 세로 30㎝ 크기의 ‘미니’ 소녀상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다. 모양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지만,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앙증맞게 줄어든 크기는 부지 선정에 적잖이 애를 먹었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교실 한 편이든, 복도 한가운데든 부담 없이 그저 ‘슥’ 하고 올려놓는 곳이 바로 소녀상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제작 비용의 부담도 대폭 줄었다. 단돈 50만원, 전교생 500명이 한 사람당 1,000원씩만 보탠다면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전교생이 49명뿐인 강원도 산골 마을 학교에서도 텃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팔아 50만원을 모았다. 저 멀리 바다 건너 제주에서도 ‘함께 하고 싶다’는 기별이 왔다. “학원에서 제주도 출신의 아이를 만났는데,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학교 이름이 어딘가 익숙한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에서 처음 작은 소녀상을 세웠던 바로 그 학교더라고요. 거기 학생들도 작은 소녀상을 애지중지 아낀대요. 난생처음 본 아인데, 왠지 친구처럼 느껴지더라고요.”(이나연) (관련기사☞ 100개 학교에 ‘작은 소녀상’ 건립 성공한 장한 고교생들)

0가로, 세로 30㎝크기의 소녀상은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약 1/5 크기로 축소한 것이다. 학교 도서관이나 화단, 학생들과 함께하는 공간에 세워졌다. 주먹도끼 제공
0가로, 세로 30㎝크기의 소녀상은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약 1/5 크기로 축소한 것이다. 학교 도서관이나 화단, 학생들과 함께하는 공간에 세워졌다. 주먹도끼 제공

 

 ◇“100개까지 왔으니 239개를 채우자”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16년 당시만 해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주도했던 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들은 교육당국 눈치보기에 바빴다. “아무리 학생들이 원해도, 학교 차원에선 ‘절대 안 된다’며 거절하는 경우가 꽤 많았어요. 특히 지역정서가 보수적인 대구에선 ‘교육청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요.”(성환철) 이렇게 작은 소녀상 세우기가 불발된 학교만 해도 100여 곳에 달한다. “그래도 프로젝트 시작 1년여 만인 2017년 봄, 첫 목표였던 100개를 모두 채웠어요. 아예 ‘국내 위안부 할머니들의 숫자에 맞춰서 239개를 채워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불과 반년만인 지난해 9월 그마저도 모두 달성했죠.”(이나연)

물론 실패로 돌아간 시도들도 있다.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아이와 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결국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아이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더라고요. ‘아, 이 정도로 교사들의 생각이 있는 학교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일본 학교들과는 다를 수 있겠다’ 기대했어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어로 설명이 된 영상까지 미리 구해뒀을 정도로요.” (성환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말문을 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걱정대로였다. “그곳 학생들과 영상통화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넌지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서로 아는 걸 얘기해보는 건 어때?’하고 물었는데, 분위기가 단번에 싸해졌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그건 안될 것 같다’며 거절을 하더라고요. 아,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어요.”(권영서)

실제로 일본에선 초ㆍ중ㆍ고 역사 교과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한 내용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 대다수의 10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이유다. “게다가 보수적 언론 탓에 어린 학생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거예요. 배운 게 없으니 근거 없는 반감만 더 심해지는 상황이라… 앞날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부터 그 어떤 반성도 전해 듣지 못한 미래세대가 사회의 주축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 이 또한 우리 아이들 앞에 남겨질 무거운 짐이겠죠.”(성환철)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 지난 10년간 성환철 선생님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에 새기는 말이다. “우열을 가리는 세상 속에선 1등만 살아남고 남겨진 모든 이들이 패자가 돼요. 우리 아이들은 ‘조금 어리석다 할지라도, 미련스럽다 할지라도, 각자 ‘옮기고 싶은 자신만의 산’이 있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주먹도끼 친구들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 공부를 좀 덜 했을지언정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산’을 옮긴 시간들이지 않을까요.” 이들은 이제 또 어떤 산을 옮기게 될까. 2017년 1월 수요집회에 참여한 주먹도끼 학생들의 모습. 성환철 선생님 제공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 지난 10년간 성환철 선생님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에 새기는 말이다. “우열을 가리는 세상 속에선 1등만 살아남고 남겨진 모든 이들이 패자가 돼요. 우리 아이들은 ‘조금 어리석다 할지라도, 미련스럽다 할지라도, 각자 ‘옮기고 싶은 자신만의 산’이 있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주먹도끼 친구들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 공부를 좀 덜 했을지언정 뭔가 남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산’을 옮긴 시간들이지 않을까요.” 이들은 이제 또 어떤 산을 옮기게 될까. 2017년 1월 수요집회에 참여한 주먹도끼 학생들의 모습. 성환철 선생님 제공

 ◇언젠가 단 한 분도 남아계시지 않더라도…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난 10년 동안 반복해서 느껴온 ‘허무함’이 있어요. 제가 가르친 역사 지식의 유통기한은 과연 얼마나 될까 따져보니 길어도 2~3년인 거예요. 고3 친구들은 수능을 보기도 전에 보던 책을 일제히 버려요. ‘지식’의 쓸모는 딱 거기까지라는 거죠. 뭔가, 아이들 삶에 보다 의미 있는 것을 주고 싶었어요.”(성환철) 그가 매년 학교의 우려를 무릅쓰고 아이들을 수요집회 현장으로 데려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역사도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예요. 흐르는 시간 속에 같이 떠내려 가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춰 서서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죠. 그래서 경험하게 했어요. 몸으로 실감한 것들은 인생에서 잘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과연 선생님의 바람대로, 제 손으로 이룬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경험이 만든 확신이었다. “저는 소녀상이 광화문에 선 세종대왕 동상 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시대를 반복해 소환하려는 시도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들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면 좋겠어요.”(김은솔) “언젠가 단 한 분의 할머님도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날이 오겠죠? 하지만 할머니들의 이야길 기억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면…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가 있는 한 싸움은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권영서) 두 손을 맞잡고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하시던 할머니들께 더 이상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될 그 날까지 말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