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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아름답고 달달한... 돼지 염장기술자 아가씨

입력
2018.11.14 04:40
17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둘시네아. 돈키호테의 연인. 달콤하다는 뜻의 둘세(dulce)로부터 파생된 달달한 여자. ‘돈키호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건만 단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미지의 여자.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자. 돈키호테에 의하면, 시인들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부여했던 모든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 미모의 소유자다. 황금빛 머릿결, 넓은 이마, 무지개 같은 눈썹, 반짝이는 눈동자, 장밋빛 두 뺨, 산홋빛 입술, 진주 같은 이, 석고같은 하얀 목, 대리석 같은 가슴, 상아빛 두선, 눈처럼 하얀 피부, 전 우주의 여왕으로 불리어도 마땅할 여자다. 물론 돈키호테도 직접 본 적은 없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환상 속 그대일 뿐이므로.

그런데 산초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둘시네아의 고향 엘 토보소로 가서 돈키호테의 편지를 전하고 오라는 것. 그들이 있는 시에라 모네라에서 엘토보소까지는 왕복 350㎞. 쉬지 않고 꼬박 걸어간다 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다. 꾀돌이 산초가 그 임무를 성실히 행할 리가 없다. 설사 그곳에 도착한다 해도, 상상 속의 인물에게 어찌 편지를 전한단 말인가. 어차피 상상 속의 인물, 상상에는 상상으로, 상상으로 만나 편지를 전하면 될 일. 산초는 슬렁슬렁 놀다가 돈키호테에게 돌아간다. 둘시네아를 만나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나으리. 그런데 아뿔싸, 산초가 만난 둘시네아를 자세히 묘사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다음은 돈키호테와 산초의 일문일답. 그들 각자의 상상이 챙강챙강 부딪치는 순간이다.

그 아름다운 여왕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던가? 분명히 진주를 꿰거나 금실로 문장장식 수를 놓고 계셨겠지? 집 마당에서 밀을 키로 쳐서 거르고 계시던데요. 그 밀알들이 그분의 손에 닿아 진주로 변하던가? 밀알이 순백색이던가? 그냥 누런색이던데요. 그렇다면 그분 손을 거쳐 하얀 빵이 되었겠지. 내 편지에 입을 맞추시던가? 키질을 계속하면서 그냥 자루 위에 올려놓고 가라고 하시던데요. 나에 대해 뭐라 물으시던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그분 곁에 갔을 때 아라비아의 향기나 덤불 속의 장미나 들판에 피는 붓꽃의 향기가 나지 않던가? 제 코에는 남자 냄새 같은 걸 느꼈습니다. 몸을 많이 움직여 땀이 나서 그랬던 게 틀림없습니다. 소식을 전한 사례로 보석 같은 걸 주시지 않던가? 빵 한 조각과 양젖치즈를 주셨습니다요.

아무래도 산초의 승리인 것 같다. 그럴 수밖에. 돈키호테의 상상은 공중에 붕 뜬 뜬구름이라면, 산초의 상상은 현실에 두 다리를 박은 것이니까. 산초가 즐겨 쓰는 속담처럼 산초의 둘시네아는 말뚝에 걸린 염장돼지고기였으니까. 산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시네아를 만들어낸 모델이 알돈사 로렌소라는 것을. 산초가 아는 알돈사 로렌소는 돼지고기 염장하는데 최고의 손맛을 자랑하는 여자였으며, 마을에서 제일 힘센 젊은이보다 몽둥이를 잘 던지고,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을 종탑에서 먼 곳의 휴경지에 있는 젊은이들을 불러 세울 수 있고, 예쁜 척하는 애교 따위는 전혀 없고, 아무하고나 장난치고 입담이 아주 좋은 여자였다.

돈키호테의 상상과 산초의 기억의 간극. 꿀과 베이컨의 간극. 돈키호테는 말한다. 저 알돈사 로렌소라는 여자가 아름답고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믿으면 되는 거라고. 실제로 고귀하다고 상상하고 믿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그 말이 맞다 쳐도, 나로서는 산초가 만난 둘시네아가 더 매력적이다. 입담 좋고 힘도 세고 목소리도 걸걸한 여장부, 보석 대신 빵과 양젖치즈를 선물할 줄 아는, 최고의 돼지고기 염장기술자 아가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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