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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곧 복(福)이다” 하얀 지붕 담장과 물구멍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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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휘주문화(徽州文化)는 황산 일대 1부 6현에 이른다. 대부분 안후이성이지만 유일하게 장시성에 위치한 우위엔(婺源) 일대를 답사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풍성한 인문이 어울린 고촌락이자 휘상(徽商ㆍ휘주상인)의 본고장이다. 황산 일대 ‘휘주문화’를 4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황산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을 달리면 저링(浙岭)이다. 동남쪽 저장성으로 흐르는 신안강(新安江) 수원 중 하나다. 고개를 넘으면 장시성 상라오시(上饒市)에 속한 우위엔현(婺源縣)이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초나라를 동서로 가르는 분수령이었고, 지금은 안후이성과 장시성의 경계다. 오초분원(吳楚分源) 비석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 귀퉁이에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은 아주 오래돼 보이지는 않는다.
저링 고개에는 다 쓰러져가는 퇴포총(堆婆冢ㆍ노파를 기리는 돌무덤)이 하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남북조시대에 일찍 남편과 사별한 부인이 저링 고개 부근의 산을 개간했다. 부인은 조그만 정자를 하나 짓고 고개를 오가는 상인들을 위해 푼돈조차 받지 않고 차를 대접했다. 갈증을 잊게 해주는 꿀맛 같은 선의였다. 부인이 죽은 후에는 유언에 따라 정자 뒤에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었다. 빈손이건 짐을 지건, 남쪽이나 북쪽 어디에서 오르더라도 길손들은 모두 동그란 돌 하나씩을 가지고 와서 무덤 위에 쌓았다. 길목마다 자리 잡은 정자에서는 부인의 풍속을 따라 차를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휘주의 인문정신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물론 과거의 유습이다.
◇휘주 고촌락의 상징 분장대와
내리막길을 달리자 휘주만의 낭만적 풍광이 펼쳐진다. 하얀 벽과 검푸른 기와로 치장한 고건축군이다. 분가루와 먹칠, 담장과 기와를 분장대와(粉墻黛瓦)라 부른다.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담백하다. 가파른 길을 꾸불꾸불 내려가면 ‘오초분원 제일촌’이라 불리는 링쟈오촌(岭脚村)이다. 퇴포총 주인인 부인도 이 마을 사람이다. 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여인이 보이고 벽에는 ‘과학적 발전관을 수행하고 조화로운 신농촌을 창건하자!’라는 구호가 붙어있다. 후진타오 주석 시대의 유물이다.
첫 목적지는 여기서 10리 남쪽에 있는 훙관촌(虹關村)이다.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자그마한 관문이 있다. 옛길로 고개를 넘어가는 상인이라면 반드시 지나야 한다. 동그란 문 위에 새긴 약쇄남관(鑰鎖南關) 편액 앞에서 머뭇거린다. 열쇠와 자물쇠는 무슨 의미일까. ‘나라의 문을 열고 잠그는구나’라고 해석하는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여기는 변경 마을이었으니 말이다.
왼쪽으로 뚫린 문을 바라보고 학생 두 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연필로 데생 후 물감으로 색을 입힌다. 이 공간은 학당이던 문창각(文昌閣)이었다. 맞은편에는 다리가 하나 있고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른다. 다리 바깥 벽에 수공(秀拱) 편액이 있어 수공교라 부른다. 영화 촬영지여서 학생들이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다리를 오가는 사람도 그림 속에 들어가는지 궁금해진다.
휘주마을은 산비탈에 집을 짓고 생활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골고루 나눠 쓰고 서서히 빠져나가다 멈춘다. 이런 곳을 수구(水口)라고 한다. 휘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구로 훙관촌을 꼽는다. 담긴 물은 수구를 넘어 도랑으로 변해 흘러간다. 맑은 수구 부근에 그림 그리는 학생들이 많다. 이목구비 반듯하고 꼿꼿하면서도 눈빛이 인자한 할아버지가 마실 나왔다. 천천히 걸어오더니 뒷짐 진 채 그림을 그리는 여학생 옆에 섰다. 잠시 감상하더니 도랑을 따라 내려간다.
◇훙안촌 1400년 녹나무와 중국 최고의 조각 예술
천년고장 훙관촌으로 들어선다. 마을 광장에 오랜 풍파를 견딘 웅장한 녹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26m가 넘고 아래 지름은 3.4m다. 긴 곰방대를 문 사람에게 물었더니 1,400년이 넘는다고 한다. 통에 넣고 다니는 갈색 담뱃잎을 한 움큼 꺼낸다. 얼마나 피우고 또 피웠던지 곰방대가 흑돌처럼 까맣다. 연기를 뿜으며 기분 좋게 핀다. 한 번 맛보자 했더니 넌지시 내민다. 연기가 훅 들어와 숨이 막혔지만, 나름 향연(香烟)이다. 휘주에 유명한 게 많은데 담배도 그중 하나다.
일행이 외국인임을 알아 본 할아버지가 자꾸 따라오라고 한다. 자기 집을 보여주겠다는 ‘자랑’ 또는 ‘유인’이다. 담장이 높아 좁디좁은 골목을 계속 걷는다. 회벽에 걸린 파란색 공중전화가 낯설다. 마을을 치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덕분이다. 계지당(繼志堂)이라는 건물 앞에 다다른다. 12세기 남송시대에 형성된 첨(詹)씨 집성촌이지만, 지금 남은 가옥은 명청시대 휘파(徽派) 고건축이다. 계지당은 전통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 그다지 수선도 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휘주 건축물에는 중국 최고의 조각 예술이 보존돼 있다. 목조ㆍ전조ㆍ석조를 묶어 ‘휘주 삼조(三雕)’라 한다. 계지당도 여느 건물과 다름없이 세밀한 목조가 일품이다.
훙관촌은 수 백년 동안 휘묵(徽墨) 생산지로 알려졌다. 계지당 조상도 휘묵으로 부를 축적한 휘상(徽商)이었다. 문과 창, 기둥과 들보, 액방(額枋) 등 나무마다 각종 무늬가 새겨져 있다. 1812년에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목조 위에 덧붙인 나무판자가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문틈에 새긴 꽃과 나비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워 한동안 시선을 거두기 힘들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고추 말리는 모습에 느닷없이 취한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만난 빨간 고추 빛깔이 뜻밖의 손님처럼 반갑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하늘 색까지 선물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더 밝아 보이듯 훙관촌은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가 더 행복했다.
마을에서 계속 이어지는 작은 강을 따라 산길을 달린다. 워낙 강폭이 좁아 이름을 따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이 강은 흘러 흘러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포양호(鄱陽湖)로 숨는다. 강 옆길도 좁아 9인승 차량이 꽉 차고, 큰 버스는 도저히 통과하기 어렵다. 물론 멀리 돌아가는 길이 있다. 상류 지역이어서 나무가 무성하다. 차를 멈추고 벌목하는 일꾼과 인사한다. 얼핏 봐도 5m가 넘는 통나무를 옮기는 모습이 숙련공답게 가뿐하다.
◇‘물은 재물’ 풍수사상으로 만든 수구
점점 수구탑(水口塔)이 보인다. 휘주 문화마을 리컹(理坑) 입구다. 수구는 보통 ‘물의 입구나 출구’를 말한다. 이곳은 산 아래이니 식수 등으로 사용한 후 흘러나가는 출구다. 수구가 있다는 건 인근에 마을이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큰 나무를 심거나 탑을 짓기도 한다. 물과 바람의 흐름을 음양과 길흉화복으로 연결하는 풍수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옛 사람은 바람과 물의 기운을 따라 터를 보고 집을 지었다. ‘물은 곧 재물을 주재한다’고 생각했기에 수구 만드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재물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도록 가둔다는 뜻도 된다.
◇말머리 닯은 마두장은 귀신도 물리친다
수구로 인해 물이 풍부해진 도랑에는 쪽배를 띄웠다. 휘주 문화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이기도 하다. 물론 공짜란 없으니 물이 재물을 낳긴 하나 보다. 도랑을 사이에 두고 다리가 많고, 젊은 화가도 많다. 도화지에 건물을 그리고 있다. 가는 펜으로 그리니 붓칠보다 섬세함이 살아난다. 분장은 그냥 여백으로 두고 대와는 정교하게 그린다. 휘주 가옥은 지붕 양쪽에 담장을 쌓는다. 말머리처럼 생겨 마두장(馬頭墻)이라 부른다. 기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방풍(防風)하고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봉화(封火)한다. 외딴 산골이라 안락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이나 귀신을 막는 피사(避邪)라고도 믿었다. 화가들도 아는 듯 마두장이 더욱더 꼿꼿해 보인다.
도랑 건너편에 총천연색 벽화가 눈에 띈다. 붉은 도포를 입은 여신과 배냇저고리 아기들이 담백한 휘주마을과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불교의 설법 도구이자 재물신의 소장품을 든 식숙신(食宿神)도 뜬금없지만 차이와(財娃), 지와(吉娃), 루와(禄娃)를 보는 순간 ‘아동 학대’를 상상했다. ‘와(娃)’는 예쁜 여자 아이를 뜻한다. 객잔 문 옆 그림에는 푸와(福娃)가 ‘식숙’을 가리키고 있다. 푸와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였다. 중국인에게 복(福)은 곧 돈이다. 올림픽 때도, 지금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천심교(天心橋) 옆 객잔에 짐을 풀었다. 3층 옥상 방에서 마을 전체가 다 보인다. 지붕을 내려다보니 집안까지 살짝 보인다. 현지인은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컹(坑)’이라 부른다. 리컹의 원래 지명은 ‘이학(理學)의 발원지’를 뜻하는 리원(理源)이다. 북송 말기에 처음 거주하기 시작했고 성리학의 고향 중 하나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학명촌(理學名村)’으로 들어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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