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프랑스 동포들이 찾아냈다

입력
2018.10.30 10:30
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저항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이 재불 동포들의 노력으로 사후 60년 만에 확인됐다. 사진은 홍재하(1960년 파리 근교서 타계)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하단에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홍재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 제공=연합뉴스
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저항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이 재불 동포들의 노력으로 사후 60년 만에 확인됐다. 사진은 홍재하(1960년 파리 근교서 타계)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하단에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홍재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 제공=연합뉴스

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저항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이 재불 동포들의 노력으로 사후 60년 만에 확인됐다.

홍재하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임시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댄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 공적의 전체 내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연합뉴스의 취재 결과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와 러시아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들어온 홍재하의 2남 3녀 중 차남 장자크 홍 푸안(76)씨가 브르타뉴 지방 생브리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30일(현지시간) 확인됐다.

그는 부친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한 서신 등 희귀문서들을 누나로부터 2006년 물려받아 보관해오다 최근 한인 부부의 도움으로 이 자료의 정리를 시작했다.

장자크 씨가 보관해온 기록들에 따르면, 홍재하는 189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다.

그는 1919년 전후로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노력으로 다른 한인 34명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왔다. 유품에는 그가 러시아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기록과 황기환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다.

홍재하는 이후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결성에 참여, 이 단체 2대 회장을 지냈다.

재불 동포 1세대인 홍재하 등은 1차대전 격전지 마른에서 전후복구를 하며 번 돈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에 보탰고, 1920년에는 프랑스에서 3·1 운동 1주년 기념식도 열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들과 그 후손이 2차대전 종전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재불 동포 부부 김성영(렌 경영대 교수), 송은혜(렌2대 강사)씨가 장자크 씨를 한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면서 베일에 싸여있던 홍재하의 삶의 궤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시작됐다.

장자크 씨에 따르면, 홍재하는 1920년대 파리의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를 거쳐 프랑스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번 돈을 계속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해방 후 처음 설치된 주불 대한민국 공사관 문서의 체류목적을 적는 난에 그는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고 적었다.

'국속'을 '國束'으로 읽는다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것에 복수하고 인류 평등에 공헌하고자 프랑스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매불망 고국행을 그리던 그는 프랑스와 한국이 해방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고, 고국이 다시 전쟁에 휩싸이자 비탄에 빠져 말을 거의 잃었다고 그의 아들은 증언했다.

이후 홍재하는 마음을 다잡고 전쟁 구호물자 조달에 매달렸고, 휴전 뒤엔 귀국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60년 암으로 타계했다. 마지막까지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근교에 묻혀 있다.

홍재하는 사후 60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과 관련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다.

장자크 씨는 부친의 유품인 각종 서신과 기록들의 뜻을 풀어보려고 한국 대사관에도 접촉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주위에 아는 한인도 없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1971년 한 일간지가 홍재하의 프랑스 내 독립운동을 조명해 그의 삶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한 적이 있지만, 이후 그의 공적을 조명하는 작업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은 브르타뉴 한인회장인 김성영 교수 부부와 한인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부친이 남긴 기록 등 방대한 자료를 정리 중인 아들 장자크 씨는 전문가들에게 맡겨 이 자료의 가치를 확인할 계획이다. 또한, 부친의 삶이 재평가되면 유품을 한국에 기증할 생각도 있다.

그는 "부친이 눈을 감으신지 60년이 돼가는데 이미 너무 늦은 것 아닌가. 그래도 아버지가 그렇게 바랐지만 끝내 못 이룬 고국행이 지금이라도 꼭 이뤄지면 좋겠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재불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해온 소장학자 이장규(파리 7대 박사과정)씨는 "홍재하는 러시아와 영국을 거쳐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의 2대 회장을 지냈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와 밀접히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한 중요한 인물"이라면서 "그의 삶의 여정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뒤늦게나마 확인된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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