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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다시 못 볼 맛

입력
2018.10.17 04:40
20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식욕이 가장 왕성할 때는 첫술을 떴을 때다. 허기만으로는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왕성하고 격렬한. 무엇이 들어올지 그 실체를 확인했으니, 알겠다, 어여어여 들어오시라.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려면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 왕성한데다 뒤끝이 긴 첫술의 식욕에 속지 않으려면, 살금 걸음으로 걸어오는 포만감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소설가A는 가장 행복할 때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여행계획을 세우는 것인데, 계획이란 구체적으로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란다. 앞으로 먹게 될지도 모를 음식이 현재의 식탁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인지, 현재의 식탁이 미래의 식탁을 자극하는 것인지, 어쩌면 그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내 식욕이 가장 왕성해질 때는 일을 마친 후다. 주방정리를 하고 가게 문을 잠그고 차에 타는 순간 갑자기 식욕이 걷잡을 수 없어지는데, 그래서 어김없이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이나 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사서,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올리곤 한다. 내 식욕은 아무래도 보상심리로부터 작동하는 것 같다. 노동을 했으니 마음껏 먹어라. 그것이 너의 휴식이 되리니. 다이어트의 원칙이니 미래의 약속 같은 것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내 어머니의 식욕은 대부분 과거로 향한다. 파스타를 한 입 먹으면 스파게티를 처음 먹었던 종로의 식당에 대해, 카레라이스를 한 술 뜨면서 오래 전 가정실습 시간에 처음 해먹었던 카레의 이물감에 대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더 많은 나이여서, 미래에 먹게 될 음식에 대한 기대보다, 과거에 먹어온 음식에 대한 정보가 훨씬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가 과거의 기억으로 기수를 돌릴 때에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 만들고 있을 때 더 강렬해지곤 하는데, 가지를 썰다가 문득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거 한번 다시 먹어봤으면 좋겠어야? 할머니가 만들어준 메밀묵. 을매나 야들야들하고 찰랑거리는지. 꼭 도토리묵 같어. 이렇게 만든다. 메밀을 맷돌에 들들 타서 껍데기를 휘휘 날려. 물에 한참 불려서는 그걸 절구에 넣고 박박 문질러. 똘똘 뭉친 짚으로 살살. 돌멩이로 하는 게 아니라 짚으로 하는 거야. 그럼 느른한 게 나온다. 그걸 또 베보자기에 싸서 짜서 속껍질까지 다 걸러. 그걸로 쑤어 놓으니 을매나 구수하고 야들야들해. 껍데기는 하나도 안 들어가. 그 양반 부뚜막에 앉아서 긴 주걱을 들고. 그 양반이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최종의 음식을 향한다. 이건 누구도 못할 거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호박숙회라고 해야 하나 다슬기 물회라고 해야 하나. 다슬기를 깨끗이 씻어갖고야 그걸 살짝 삶아. 포르르. 물을 끓이다가 휘이 저어서 꺼. 다슬기는 건져서 절구통에 넣고 돌멩이나 절구로 으깨. 껍데기채, 그럼 창자는 다 깨지고 꼬투리만 남지. 그걸 일어. 살만 살살 띄워서. 그 다음에 삶아놓은 국물 있잖니. 국물이 푸르스름하니 참 이뻐. 그 국물에다 호박을 삶는 거야. 애호박을. 채썰어서. 그걸 또 건져서 식히지. 호박도 식히고 국물도 식히고. 그 다음에 그걸 한데 넣는데, 양념도 별거 읎어야? 간장이나 좀 쳤나? 파 마늘이나 넣었나? 설탕은 귀해서 구경도 못했으니 설탕도 안 넣었어. 그런데 국물이 깔끔하니 달달하니 영 맛나다? 아이고 그거 다시 한번만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

이렇게 내 어머니의 할머니의 다슬기호박숙회 맛에 이르면, 한동안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못먹고 있던 내 어머니의 식욕도 되살아, 뭐라도 자시게 된다.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으면 엄마가 해먹어도 되잖아, 물으면, 그 맛이 그 맛이가니? 라고 반문한다. 다시 못 볼 맛.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엄마 밥 좀 더 얻어먹어야겠다. 언젠가는 다시 못 볼 맛이 될 터이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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