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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위해 더 얇은 글씨로? 서울 버스 서체 변경 논란

입력
2018.10.09 04:40
수정
2018.10.09 08:19
10면
지난 8월 변경된 서울 시내버스 행선지표시판. 서울시 제공
지난 8월 변경된 서울 시내버스 행선지표시판. 서울시 제공
변경 전 서울 시내버스 행선지표시판. 서울시 제공
변경 전 서울 시내버스 행선지표시판. 서울시 제공

시각장애 1급 손지민(36)씨는 최근 자주 타는 101번 시내버스(서울 강북구 우이동~중구 서소문동)를 타려다 한참을 허둥거려야 했다. 버스 앞 창문에 붙어 있는 번호판을 겨우 볼 수 있는 저시력자인 손씨는 더더욱 노선 번호를 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손씨는 “교정 시력이 0.02가 안 돼 글씨체가 굵어야 그나마 볼 수 있는데, 바꾼 글씨체가 이전보다 훨씬 얇아졌다”며 “시각장애인들에게 물어보고 바꾸고 있는 걸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가 8월부터 시범운영 중인 버스 행선지 표시판 개선 사업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보다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기본 취지지만 정작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은 전보다 더 버스 번호와 행선지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체 시내 버스 7,405대 중 242대가 행선지 표시판을 새로 교체했다. 경기 고양시에서 서울 서초구까지 운행하는 9711A번 광역버스 및 서울 송파구 일대를 다니는 3313번 지선버스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시는 숫자가 굵은 글씨로 표기될 경우 저시력을 가진 시각장애인이 구별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어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과 함께 노선번호와 주요 행선지를 종전보다 얇은 서체로 수정하고 있다. 당초 2013년부터 계획한 사업이었으나 비용 마련 등의 문제로 늦어져 올해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5년 전 사업이라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작 시각장애인은 가시성이 더 떨어졌다는 불평이 많다. 이전 굵은 글씨체가 더 눈에 잘 들어오는데, 괜히 바꿔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장애 1급 김병수(54)씨는 “멀리서 잘 보이는 것은 일반인이나 장애인이나 똑같이 굵은 글씨”라며 “글자가 겹쳐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글자 간격을 넓힌 것이면 몰라도, 서체를 얇게 바꾸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개선이라고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 얘기도 그렇다. 이지혜 누네안과병원 각막센터 과장은 “저시력은 숫자를 얼룩진 창문을 통해 보는 것과 같아 글자는 크고 굵을수록 좋다”며 “얇은 글씨체는 무조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버스 정면보다는 오히려 옆면 행선지 표시 개선이 더 시급하다는 지적도 한다. 시각장애 2급 한승진(43)씨는 “버스가 움직이는 상황에선 버스 앞면에 써 있는 행선지를 알아보기 힘들다”며 “버스가 정차했을 때에나 겨우 옆면 행선지를 볼 수 있는데 글씨가 너무 작다”고 토로했다.

서울시는 사업 추진할 때부터 시각장애인의 의견을 최대한 들었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 의견까지 반영했다”며 “다만 연말까지 시범운영을 하면서 의견을 계속 수렴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13년 서울시 회의록에는 당시 시각장애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당시 참여했던 서울시민디자인위원들은 “디자인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서체를 변경했다. 시각장애인 대표기관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 또한 “서울시에서 버스 행선지표시판 개선 사업과 관련해 자문을 (우리에게) 요구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이진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편의시설지원센터장 역시 “얇은 글씨가 시각장애인에게 더 잘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인 의견이 아니다”며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꼬집었다.

오세훈 기자 comingh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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