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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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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다. 어떤 계기를 통해 내 삶에서 기다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다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약간의 죄의식이 들게 한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아마 내가 느낀 옅은 죄책감은 기다림이 낭비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기다림은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일로 인식되고 있다. 버스를 무작정 기다린다거나 한 통의 전화를 위해 공중전화 부스에 길게 줄을 선다는 것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이 속도의 시대는 기다리는 사람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라고 말한다. 하염없는 기다림, 목적 없는 기다림은 이제 두려움의 한 종류가 되었다.
기다림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경제 가치로 편입되면서부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현대적 의미의 시간관은 아이작 뉴턴에서 시작되었다. 뉴턴은 1687년 출간된 ‘프린키피아’에서 시간을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채 균질적으로 흐르는” “절대적이고 진짜이며 수학적인 시간”과 “흔히 진짜 시간 대신에 사용하는 상대적이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며, 통상적인 시간”으로 구분한다. 서양에서는 18세기 이후 정밀한 시계의 발달과 함께 ‘진짜이며 수학적인 시간’의 권위가 확립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실비아 아가친스키는 “시간을 측정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을 시장 가치로 편입시킴으로써 서구의 시간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현대인은 손목에 정밀한 시계를 찬 채 일 분 일 초를 돈으로 환산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시대에 기다림이란 매 순간 돈을 허공에 뿌리는 일과 같다. 기다림이 부정적인 행위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로서 내가 깨달은 것은 좋은 목가구 한 점을 만드는 것은 기술도, 공구도, 나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목가구를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기다림이, 기다림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눈길과 손길을 머물게 하는 가구를 만들게 한다. 어떤 목수가 나보다 빨리 만든다고 자랑하면 나는 일단 그를 하수로 본다. 비슷한 가구를 나보다 더 많은 과정과 시간을 들여 만들고 있는 목수가 있다면 그를 고수로 짐작한다. 대개의 경우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가구 한 점이 그럴진대, 삶에 있어 기다림의 시간이 주는 의미는 얼마나 클까?
많은 사람이 삶이 공허하다고 토로한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도 아침 인사처럼 흔하다. 나는 그 이유가 삶에서 ‘이야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삶에는 사건이 분절적으로 나열될 뿐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 사건만 나열되어 있는 삶이 충만하고 재미있을 리 없다.
해럴드 슈와이저는 “서사는 기다림에서 출발하여 이야기로 전개” 된다고 말하며, “기다림이 없다면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이야기를 품지 않은 기다림도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이야기가 사라진 것은 기다림의 실종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손목시계를 풀어 서랍 안쪽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나는 이제 버스가 도착할 시간을 미리 확인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 스마트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 행위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조금씩 기다림을 기다림 자체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그러한 노력이 당장 내 삶의 만족감을 눈에 띄게 증가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슨 손해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점점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기다림을 받아들인 만큼 나의 일상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물과 시간이 전보다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서랍 안으로 들어간 손목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을 때쯤이면 내 삶도 전보다 조금쯤 더 선명한 이야기로 변해 있을 것이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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