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빈 “제 안에 ‘그 소녀’는 아직 살고 있답니다”

입력
2018.09.12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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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죄 많은 소녀’에서 파괴적인 연기를 보여준 전여빈은 올해 한국 영화계의 ‘빛나는 발견’이다. 김혜윤 인턴기자
영화 ‘죄 많은 소녀’에서 파괴적인 연기를 보여준 전여빈은 올해 한국 영화계의 ‘빛나는 발견’이다. 김혜윤 인턴기자

달아나려 해도, 떨쳐내려 해도, 기어이 가슴을 찢고 들어앉는 송곳 같은 눈빛이었다. 영화 ‘죄 많은 소녀’(13일 개봉)에서 배우 전여빈(29)을 마주한 뒤 그 눈빛에 할퀴어 보이지 않는 생채기가 생겼다. 같은 반 친구의 죽음에 가해자로 몰린 고교생 영희.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따져 묻는 시선들은 잔인하고, 결백을 증명하려는 영희의 몸부림은 지독하다. “영희를 만난 순간, 굳게 각오했어요. 영희 그 자체가 돼야 한다고.” 10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전여빈은 여전히 영희를 품고 있었다.

‘죄 많은 소녀’는 연출자 김의석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상실감과 죄책감을 자기 고발하듯 시나리오를 썼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고, 전여빈에게 올해의 배우상을 안겼다. 전여빈은 “영화에 실린 진심의 무게를 느꼈다”고 했다. “오디션을 볼 때 감독님이 이 영화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얘기해 주셨어요. 그 앞에서 어떤 치장도 할 수 없었죠. 내가 어떤 배우인지 보여 주겠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어요. 심연에 다다를 때까지 서로 어두운 모습을 꺼내 보여 주며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어요.”

배역이 정해지지 않은 오디션이었는데 영희 역을 맡게 됐다. “왜 영희로 뽑아 주셨는지 묻지 못했어요. 아니, 묻고 싶지 않았어요. 이 영화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으니까요.” 전여빈은 연기를 하면서 “거짓 한 올도 보탤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아픔을 이겨내려는 반발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때마다 감독님이 ‘우리는 영희를 더 알아 가야 한다’고 붙들어 주셨어요. 영희가 아파해서 저도 많이 울었어요.”

영희는 친구가 죽기 직전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몰리고 책임을 추궁 당한다. 영희와 그 주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희는 친구가 죽기 직전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몰리고 책임을 추궁 당한다. 영희와 그 주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희는 어쩌다 ‘죄 많은 소녀’가 된 걸까.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이들은 그 죽음을 방조했거나 일조했을지 모른다는 죄의식을 느낀다. 그것에서 벗어나려 영희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토록 나약하다. 영희도 다르지 않다. “나라면 이런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다른 영희를 만나면 안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영희를 이해한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저에게 커다란 의문이 생겼어요. 함부로 정의하고 판단하지 말아야겠다고도 생각했죠. 그게 사람이든, 세상이든, 그 무엇이든.”

‘죄 많은 소녀’는 전여빈에게 “무의식 속 깊은 우물”을 남겼다. “생생한 꿈을 꾼 듯 영혼에 간직된 것 같다”고도 했다. 인장 같은 이 영화로 전여빈 또한 한국 영화계에 강렬한 인장을 새겼다. ‘괴물 신예’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앞으로 충무로에서 소중하게 쓰일 이름이다.

데뷔는 조금 늦었다. 영화 ‘간신’(2015)에서 첫 배역을 받았을 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 즈음부터 독립영화, 단편영화에도 부지런히 출연했다. ‘여자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 같은 작은 영화부터 상업영화인 ‘밀정’(2016)과 ‘인랑’(2018), OCN 드라마 ‘구해줘’(2017)에도 나왔다. 배우 문소리의 감독 데뷔작인 ‘여배우는 오늘도’(2017)에선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한 배우 지망생 역할로 눈도장을 찍었다.

앞으로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전여빈을 더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 김혜윤 인턴기자
앞으로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전여빈을 더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 김혜윤 인턴기자

강원 강릉시에서 자란 전여빈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의사를 꿈꿨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스무 살, 마음을 다잡으려고 영화와 시집을 닥치는 대로 봤다. 우연히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펑펑 울었다. “저런 걸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다. 연기학원 한 달 다니고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 들어갔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고 있으니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겠다”면서 무용과, 실용음악과, 회화과, 문예창작과 등 다른 전공 수업까지 청강했다. 연극을 배우려 대학로 연극 스태프로 2~3년간 일했다. “배우로 서고 말하고 움직이고 싶다”는 갈망이 더 커졌다. 오래 갈고 닦은 재능은 송곳처럼 비어져나오기 마련이다. 오빠가 찍어 준 프로필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고, 뜻밖에도 배우로 설 기회가 잇달아 찾아왔다. “저는 아직도 연기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갈급해요. 얼마 전 ‘무변광대(無邊廣大)’라는 단어를 만났는데요. 그 뜻처럼 끝없이 넓고 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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