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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말라” 벼랑 끝에서 외치는 마지막 절규

입력
2018.09.01 09:0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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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31년 고무농장 노동자 첫 시작 

 IMF 이후 고공투쟁 급격히 늘어 

 “아무리 올라가도 정부 관여 없다” 

 MB집권 후 잇단 최장기 불명예 

 #2 

 “강성 노조의 극단 투쟁 수단? 

 노조 힘 약할수록 고공 내몰려” 

 ‘온전한 삶 탈환’ 저항의 진지로 

옥상은 해고 노동자들이 몰리는 마지막 투쟁의 장소다. 2013년 5월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재능교육 노조 여민희, 오수영 조합원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이들은 농성 2822일만인 그 해 9월 사측과 복직합의서를 체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옥상은 해고 노동자들이 몰리는 마지막 투쟁의 장소다. 2013년 5월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재능교육 노조 여민희, 오수영 조합원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이들은 농성 2822일만인 그 해 9월 사측과 복직합의서를 체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요. 누구든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이요.”

한국 노동운동사의 첫 고공농성은 서른 살 노동자 강주룡의 손에서 시작됐다.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기와지붕 위를 맨손으로 기어올랐다. 평원고무농장 노동자인 그는 새벽 내내 지붕에 매달려 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공장 측을 규탄했다. 이는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첫 장면이기도 하다. 9시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옥중 단식투쟁을 이어가며 임금 삭감을 막아냈다. 하지만 자신은 해고당하고 이듬해 빈민굴에서 숨을 거뒀다.

2018년의 한국 사회, 이를 닮은 절규가 여전히 넘친다. 고공농성 연대 및 공론화를 위해 2015년 창간된 굴뚝신문에 따르면, 2000~2015년 전국에서 한 군데도 고공농성이 없었던 날은 3년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분석 결과, 이 기간 곳곳의 굴뚝, 철탑, 교각에 오른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77건), 해고 철회와 복직(48건), 노동조합 인정(32건) 등을 호소했다. 87년의 시차가 무색하다.

 다 걸고 싸워야 하는 나라 

고공투쟁이 재등장한 것은 민주화 이후 90년 4월이다. 현대중공업 노조 이갑용 비상대책위원장과 노조원 100여명이 82m 높이 크레인 ‘골리앗’을 점거했다. 이들은 노동탄압 중지, 임단협 성실교섭 등을 요구했다. 91년엔 대우조선 노조 투쟁결사대가 파업 돌입 직후 크레인에 올랐다. 당시 고공농성은 대부분 연행, 구속 등으로 마무리됐다. 주요 생산시설을 점거한 대목이 줄줄이 유죄 근거가 된 까닭이다.

외환위기 이후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고공농성은 더 많아졌고, 100일을 넘기는 일도 왕왕 생겨났다. 농성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들도 나왔다. 2003년 6월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은 129일의 농성 끝에 생을 등졌다.

굴뚝신문 기획자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이 무렵 노조의 힘이 약해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고공농성이 많아지고, 길어지는 패턴이 두드러진다”며 “강성 노조가 극단 투쟁의 수단으로 고공농성을 택한다는 오해와 달리 노조 교섭력이 약할수록 이런 투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는 원래부터 노조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하고, 큰 권력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죠. 대정부 및 대자본 교섭력이 그만큼 취약하다 보니 산업 영역이나 정책적 방법으로 노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극한투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2004년 5월에는 전국타워크레인노조 조합원 480여명이 오전부터 서울 등 수도권의 공사현장 71곳의 타워크레인 87대를 점거하며 근로조건 개선을 외쳤다. 현대차 울산공장 철탑에서, 코오롱 구미공장 송전탑에서, 청와대 앞 타워크레인에서.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노조탄압을 중단하라”는 외침은 이어졌다.

고공농성이 최장기 불명예 기록을 갱신하기 시작한 건 이명박(MB) 정권의 집권 이후다. 박 집행위원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고공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하려 들던 앞선 정권들과 달리 MB정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는 소위 ‘말려 죽이기’ 전술이 공공연한 태도로 굳었다”며 “아무리 너희들이 거기 올라가봐야 정부는 나서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퍼지면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아픔을 너무 우습게, 쉽게 생각하는 정서가 만연해졌다”고 했다.

MB정권 내내 옥상, 크레인, 굴뚝, 철탑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 코스콤 비정규직 노조,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쌍용차 노조, GM대우 비정규직 노조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309일간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농성이 장기화하자 2011년엔 지지방문을 위한 ‘희망버스’가 고공농성 현장에 등장하기도 했다. 2015년 7월 8일 경북 구미공장 안 굴뚝에 올랐던 스타케미칼 해고자 차광호씨는 408일 만에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라는 아픈 기록과 함께 땅을 밟았지만, 약속이행이 되지 않아 다시 굴뚝을 오른 동료들을 지켜보는 상황이다.

지난달 31일 기준, 노동자들이 위태롭게 매달린 현장은 모두 세 곳이다. 전북 전주시청 조명탑에서는 택시노동자 김재주씨가, 서울 양천구 열병합발전소 3번 굴뚝에서는 홍기탁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강원 영월시 영월교통 인근 35m높이 다리에 안정호 공공운수노조 서울경기강원지역버스지부 영월교통지회장, 김상현 지부 조직국장이 외로움과 싸운다. 안 지회장과 김 국장은 지난달 8일 오전 직장폐쇄 해제와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다리에 올랐다.

2005년 5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지역주택조합 재개발아파트 공사현장의 플랜트 노조 고공단식농성이 18일로 장기화 되고 있다. 크래인 위 단식 중인 3인이 힘이 부친 듯 임시 천막(크래인 오른쪽)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5년 5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지역주택조합 재개발아파트 공사현장의 플랜트 노조 고공단식농성이 18일로 장기화 되고 있다. 크래인 위 단식 중인 3인이 힘이 부친 듯 임시 천막(크래인 오른쪽)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잊고 사는 이도 공범이다” 

갈수록 심화하는 고공농성 장기화의 배경에는 세간의 냉소와 무관심이 자리한다. '옥상의 정치' 공저자인 임태훈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 교수는 “쌍용차 투쟁, 용산 참사만 봐도 고공은 노동자와 철거민이 마지막으로 몰리는 물리적 장소, 즉 벼랑 끝”이라며 “마지막 순간에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잊히고, 진압으로 인한 가장 극단적 폭력이 이뤄지는데도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곳”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기억상실증을 필요로 하잖아요. 투쟁, 농성,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다 기억하고, 다 파악하고, 다 아는 채로는 도저히 일상에 돌아와 살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기억과 망각의 절취선에 딱 고공이 놓여 있는 셈이죠.”

무심하게 투쟁 기간을 세는 일이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임 교수는 “단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고공농성, 그 절박한 투쟁의 기간을 100일, 200일, 300일 하는 식으로 계량화, 수량화하는 서술도 매우 문제”라며 “투쟁 풍경을 읽는 이런 문법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경남 밀양 송전탑 투쟁 등 장기투쟁 현장을 지켜 온 문학평론가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고공농성은 직장, 공장, 작업장 등 당초 주어진 장소에서 추방된 이들이 몸 둘 곳 없어 밀려나는 순간, 새롭게 탈환하려는 저항의 거점이자 진지”라며 “당초 목적은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인데 어떤 식으로든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니 대부분의 싸움이 온 존재를 건 투쟁이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런 싸움에 내몰리게 된 과정도 문제지만, 위세에 눌려서든 각자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 때문이든 방치하고 잊어가는 태도가 더 아프죠.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지만, 우리 사회에선 어떤 상식적 요구도 결국엔 개인이 온 인생을 걸고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초인적 싸움, ‘혼의 투쟁’이 됩니다.”

권 교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자거나, 나도 저기로 내몰릴 수 있다는 식의 대안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내 문제가 아니더라’도 윤리적, 당위적 문제에 대해 기억하고, 반응하고, 분노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라며 “이렇게 많은 이가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에 대한 고민을 더는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수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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