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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처럼 숨은 멋진 공간들... 을지로 뒷골목에 뉴트로 바람

입력
2018.08.29 04:40
수정
2018.08.29 09:5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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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에 커피한약방과 혜민당이 좁은 골목에서 마주 보고 있다. 색은 바랬지만 예스러운 문양이 남아 있는 목문의 문살은 커피한약방과 혜민당의 대표 강윤석씨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것이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울 중구 을지로에 커피한약방과 혜민당이 좁은 골목에서 마주 보고 있다. 색은 바랬지만 예스러운 문양이 남아 있는 목문의 문살은 커피한약방과 혜민당의 대표 강윤석씨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것이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27일 오후 2시 여대생 3명이 서울 을지로 골목의 한 허름한 건물에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주며 계단을 올라왔다. 1층 호프집을 지나 2층 인쇄소 앞에서 그들은 걸음을 한 번 멈추고 고개를 갸웃댄다. 3층까지 올라가야 하나 망설이다 음악 소리에 용기를 내 발걸음을 떼어 본다. 3층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에 안도의 웃음꽃을 피우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곳은 지난해 11월 문을 연 카페 ‘잔’이다. 폭격을 당한 듯 뚫린 벽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가득 담긴 벽지가 발려 있다. 오래된 찬장에는 제각기 다른 커피잔이 줄지어 있다. 큼직한 꽃무늬가 인상적인 커튼과 모자가 주렁주렁 걸린 등도 여느 카페에서 보기 힘든 장식이다. 이곳을 찾은 서자영(24)씨는 “낡고 허름한 을지로에서 보물찾기 하듯 멋진 공간을 찾아 다닌다”며 “개인의 취향과 독특한 감각을 볼 수 있어서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복고(復古)라고 해서 단지 옛날 것만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복고도 새로울 수 있다. 과거의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뉴트로(New와 Retro의 합성어)’가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최근 을지로가 뉴트로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1970년대 을지로는 국내 제조업의 중심으로 번창했지만 첨단산업이 발전하면서 쇠락해갔다. 대부분의 철물점과 인쇄소 등은 문을 닫았고, 텅 빈 건물은 늘어났다. 하지만 최근 이곳은 신선하고 독창적인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000년 묵은 탁자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커피한약방 대표 강윤석씨가 3년 전 우연히 받은 자개장과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고나무 테이블 등 사연이 각기 담긴 소품이 카페를 장식한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커피한약방 대표 강윤석씨가 3년 전 우연히 받은 자개장과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고나무 테이블 등 사연이 각기 담긴 소품이 카페를 장식한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든 비좁은 을지로 뒷골목에 위치한 커피한약방은 2013년 문을 열었다. 높낮이가 다른 간판들과 불균형한 형태의 가게들 틈새에서 입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차라리 커피 볶는 향을 따르는 게 더 빠를지도. 벽돌과 타일, 시멘트가 혼재된 벽과 공업기계와 페인트 통, 박스 등이 쌓인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지나 문 앞에 겨우 도착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백열전구를 끼운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조명, 자개장으로 만든 매대, 한약재를 담는 서랍장, 괘종시계, 개화기에 사용한 저울 등은 을지로의 후미진 뒷골목 대신 ‘모던보이’가 활약했던 근대의 카페골목을 연상시킨다. 연극배우인 주인 강윤석(48)씨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을지로에서 사업을 했다”며 “70년대만 해도 다방만 50군데가 넘었고, 양복점과 구둣방, 미용실 등이 즐비해 당시 멋쟁이들은 모두 을지로에 모였었다”고 추억을 떠올렸다. 쇠퇴한 을지로에 당시의 멋을 살려보고자 카페를 연 그는 “한약처럼 정성을 들여 커피를 내리겠다”는 생각에 상호를 지었는데, 이 자리가 실제 조선시대 의약관청인 혜민서가 있던 곳이어서 의미가 더 깊어졌다. 강씨는 맞은편 양과자와 케이크를 판매하는 혜민당도 함께 운영한다.

커피한약방에는 그가 중국과 일본, 유럽 등에서 찾은 근ㆍ현대 소품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것이 1900년대 만들어진 4폭짜리 자개장과 송나라 때 만든 3m짜리 고나무 테이블. 자개장은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서 얻었다. 강씨가 옛 소품을 수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 자개장을 써 달라며 연락을 해 받은 것이다. 강씨는 “제 물건이라는 인식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게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고나무 테이블은 중국 고가구 수집상에 사흘 넘게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읍소해 구한 것이다. 그는 “오래된 할머니의 다락방을 찾는 느낌으로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딸과 함께 이곳을 찾은 박해령(63)씨는 “우리 세대가 추억을 되짚으려면 그냥 다방으로 가면된다”며 “깨끗하고 편리한 여느 커피숍과 달리 지저분한 을지로 안에 아늑하고 감성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라고 했다. 을지로에 직장이 있다는 미국인 제임스 헤지(45)는 “어딜 가도 있는 스타벅스 대신 한국 고유의 느낌이 나는 이곳을 자주 온다”고 말했다.

관습을 비트는 일탈의 공간

서울 중국 을지로의 한 건물 4층에 있는 감각의제국 벽에는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둘리 트로피와 배우 박영규, 개그맨 심형래,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을 선고한 이정미 재판관의 사진 등이 붙어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울 중국 을지로의 한 건물 4층에 있는 감각의제국 벽에는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둘리 트로피와 배우 박영규, 개그맨 심형래,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을 선고한 이정미 재판관의 사진 등이 붙어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일탈의 공간으로 을지로를 해석하는 이도 있다. 올해 1월 을지로에 입성한 술집 감각의 제국을 운영하는 철순(가명ㆍ30)씨는 “이곳에서 제대로 즐겨보자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며 “일상에서 맹목적으로 좇는 행복, 출세 등을 던져버리고 여기서만큼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감각의 제국은 과거 불법 안마업소였던 곳을 개조해 꾸몄다. 노래방과 음식점 등 유흥시설이 있는 낡은 건물의 4층에 위치한 이곳은 간판도 없다. 인테리어는 확실히 기존의 술집과는 다르다. 안마업소에 있던 거울과 바 테이블, 조명 등을 그대로 뒀다. 여기에 현재는 구식이라고 취급 받는 강당 의자, 독서실의 1인용 책상, 목욕탕의 세신 탁자, 파라솔 등이 저마다의 개성을 뿜으며 한데 모여 있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구슬과 공기놀이, 스티커와 망원경, 인형 등은 한껏 촌스럽다. 에어컨에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을 붙여 놓고, ‘얼음공주’라고 써 놓는 등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요소들도 많다. 이곳의 상징은 벽에 걸린, 두 눈이 X자로 그려진 둘리 트로피. 철순씨는 “동심은 파괴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걸었다”며 “어른이 될수록 퇴폐적인 놀이문화에 젖어 드는 것을 꼬집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을지로에 감각의 제국을 세운 이유도 기성 문화를 비틀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을지로에 이렇게 놀 수 있는 데가 있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며 “과거에 번창했던 모습이 사라진 이 곳에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을지로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라고 했다.

감각의 제국은 매주 금, 토요일 저녁에 ‘감각의 밤’ 행사를 연다. 디제잉 하는 의사, 일러스트를 그리는 회사원 등 각자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자리다. 철순씨는 “부와 명예, 행복 등 맹목적으로 좇게 되는 것들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주기 위해 마련했다”며 “여기서는 SNS 아이디로 서로를 부르며 기차놀이도 한다”고 했다. 감각의 제국에서 판매하는 ‘피카츄 돈가스’, ‘카와이안 피자’ 등도 재미 거리다. 1980~90년대 소품을 활용해 세련되고 모던한 최신 문화를 비웃는다. 철순씨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을지로나 과거 소품들이 모두 새로운 것”이라며 “이들은 여기서 ‘나 이렇게 논다’는 인증을 하면서 자신을 차별화하고 드러내는 걸 즐긴다”고 말했다.

허름한 뒷골목에 마련된 작은 아지트

서울 중구 을지로 뒷골목 LP바 평균율에 주인인 성민기씨가 10여년간 모은 3,400여장의 LP가 빽빽이 꽂혀져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울 중구 을지로 뒷골목 LP바 평균율에 주인인 성민기씨가 10여년간 모은 3,400여장의 LP가 빽빽이 꽂혀져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미술을 전공했던 성민기(30)씨는 올해 4월 을지로에 LP바 평균율을 차렸다. 알싸한 페인트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계단을 따라 3층 철문 앞에 서면 LP가 나란히 꽂혀진 포스터 한 장에 평균율이라고 적혀 있다. 철문을 열면 재즈와 클래식이 흘러 나오고, 벽면 한 면이 가득 채워진 LP와 화려한 문양의 카펫, 체크 무늬의 의자 등 작은 아지트에 찾아온 느낌이 든다. 라디오와 식물, 찬장 등도 모두 그의 손때 묻은 소품들이다. 재즈와 흑인음악을 좋아해 음악을 같이 듣고 싶어서 가게를 열었다는 성씨는 “오래된 감성이 깃든 음악이 좋아 1970~80년대 유행했던 LP를 모았다”며 “나이 드신 분보다 젊은 사람들이나 직장인들이 이곳을 찾으면서 오래된 음악을 처음 들어보고 좋다고 얘기해준다”고 했다. 그는 “창문을 열면 고층빌딩이 보이는데, 그 아래에 이런 낡은 뒷골목이 이질적으로 있다는 데 을지로의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을지로에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 많다. 치마를 둘러쓴 듯한 조명등이 돋보이는 카페 호텔수선화, 고전적인 찻잔과 식탁보로 꾸민 카페 작은물, 붉은 융단이 바닥에 깔린 카페 커피사마리아 등도 뉴트로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중ㆍ장년층에게 을지로는 옛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으로, 세련되고 모던한 문화에만 익숙한 젊은층에는 신선한 공간으로 인식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태원, 강남 등과 달리 현재도 인쇄, 제지, 도기, 공업 등 산업 관련 가게들이 남아 새로 들어선 문화 공간들과 공존하면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서울 중구 을지로의 한 건물 4층에 있는 감각의 제국 출입문에는 ‘헌팅금지’, ‘부비부비 금지’ 등 입장 전 필독 사항이 적혀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서울 중구 을지로의 한 건물 4층에 있는 감각의 제국 출입문에는 ‘헌팅금지’, ‘부비부비 금지’ 등 입장 전 필독 사항이 적혀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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