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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0’ 기대했는데… 돌아온 건 해고”

입력
2018.08.14 04:40
수정
2018.08.14 10:44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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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탈락한 비정규직 대량 실직 위기

급여, 인사 차별 ‘무늬만 정규직’ 양산

박구원기자
박구원기자

“정규직 전환을 먼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에겐 해고만 남은 건가요?”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사 K씨는 최근 밤잠을 못 이룬다. 지난달 연구원의 전환대상 비정규직 93명에 대한 면접에서 K씨를 비롯 무려 72명이 탈락했기 때문이다. 탈락자 중엔 무려 14년간 일한 석ㆍ박사 연구원도 있었다. K씨는 “기관장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인공지능(AI) 한의사 관련 연구원들만 대거 전환됐다”고 비판했다. 탈락자들의 집단 이의신청으로 2차 전환 심사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몇 명이나 구제될 지는 미지수다. 결국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해고의 수순을 따르게 될 공산이 크다. 지난 6월 계약직 연구원들이 대부분 5개월(7~11월)짜리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계약서엔 ‘(11월 말까지) 전환이 되지 않을 경우 근로계약은 당연 종료된다’는 족쇄 조항도 담겼다. 연구원들 모두 비정규직 ‘제로’를 내 세운 정부를 믿었지만 이젠 비정규직에서도 쫓겨날 판이다.

사실 면접을 통과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이들의 과실도 크지 않다. 엄밀히 따지면 정규직이 아닌 ‘기술연구직’이란 직군으로 분류돼 고용만 안정될 뿐이다. 급여ㆍ수당이 정규직화(化)되는 것도 아니다. K씨는 “정부에 정규직을 요구한 적도, 많은 걸 바란 적도 없다”며 “정부가 먼저 운을 떼 믿었는데, 결국 일터에서 쫓겨날 위기”라고 토로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최근 비정규직 350명 중 26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겉으로 보면 전환율이 75%에 달하지만 속내용은 다르다. 기관은 기간제 연구원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정부가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작년 7월 20일을 기준으로 그 전에 계약을 1회 이상 갱신한 연구원은 A그룹, 최초 계약기간에 속한 연구원은 B그룹으로 분류했다. 이후 A그룹은 250명 중 228명(91%)을 전환했다. 반면 B그룹에서는 90명 중 27명(30%)만 정규직이 됐다. 연구원 L씨는 “2013년부터 5년 계약을 맺고 연구해온 이는 B그룹에 속해 탈락하고, 2016년 초 입사 후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한 이는 A그룹에 속해 정규직이 됐다”고 꼬집었다. B그룹 탈락자들은 계약이 종료되면 나가야 한다. L씨는 “기관에선 ‘계약을 연장해주고 싶지만 정부가 비정규직 제로를 외치고 있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L씨의 계약도 2020년 끝난다.

문재인 대통령의 ‘1호 정책’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기관별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획일적 정책에 멀쩡한 비정규직이 정책 때문에 오히려 생업을 잃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기관장 입맛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목표는 있지만 지원은 없는 자의적이고 무계획적인 집행도 문제다. 지난 1년간 정규직 전환 추진에 따른 부작용을 점검해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숫자와 현실의 괴리 커

대다수 기관, 정규직 아닌

무기계약직ㆍ별도직군 형태 전환

“고용안정 외엔 달라진 게 없어”

획일적 가이드라인에 혼란도

탈락자 관련 대책 규정에 없고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무에는

유사 직무 비정규직 배정 못해

부작용 점검 보완책 마련을

“기관장들 업무 아닌 사람 심사”

무고한 희생자 구제될 수 있게

별도의 재심 절차 보장해야

대량해고, 무늬만 정규직, 노노갈등 3대 후유증

정부는 작년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기치를 내걸고 “연중 9개월 이상, 향후 2년 이상 지속될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후 지난 6월말까지 목표치(17만5,000여명)의 76%에 달하는 비정규직 13만3,000여명이 전환됐다. 이전 정부에 비해 전환 규모가 크고, ‘상시ㆍ지속 업무는 정규직’이란 원칙을 수립한 점은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숫자와 현실의 괴리는 크다. 먼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한 비정규직이 대량해고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연구직은 상황이 더 심하다. 지난달 말 기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26개 국책연구기관의 비정규직 2,700명 중 전환인원(예정포함)은 1,200명(44.4%)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계약이 끝나면 해고될 처지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한 인사팀장은 “기간제 연구원 중 50%만 전환할 계획인데, 탈락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에 규정돼 있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공공연구노조 관계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기관들도 비정규직 3,700여명 중 2,500명만 전환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인사담당자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무에는 유사ㆍ동일 직무의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없어 앞으로 채용절벽이 우려된다”고 털어놨다.

전환의 질도 논란이다. 대다수 기관은 비정규직을 기존 정규직이 아닌, 무기계약직 혹은 중규직 별도직군 형태로 전환하고 있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공공부문 전환 사례를 상담해보면 대량해고와 함께 ‘무늬만 정규직’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며 “비정규직의 3대 특성(저임금ㆍ고용불안ㆍ장시간 노동)을 모두 해소하는 게 정규직 전환의 취지인데 고용안정 외엔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정규직 전환 규모를 둘러싼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간 노노(勞勞) 갈등까지 나타나고 있다. J국책연구기관에서 비정규직의 전환 규모를 놓고 사측은 50~60명, 정규직 노조는 이보다 훨씬 적은 20~30명을 주장한 게 대표적인 예다. 비정규직 90% 이상을 전환한 K국책연구기관에선 대규모 전환으로 임금감소 등을 우려한 정규직 노조가 반발하자, 정규직 인건비는 그대로 둔 채 연구활동 비용 일부를 전환 재원으로 돌리는 식으로 갈등을 봉합하기도 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현황. 강준구 기자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현황. 강준구 기자

‘획일적ㆍ자의적’ 전환 정책, 인건비 지원도 없어

정규직 전환을 놓고 잡음이 불거진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정부나 외부단체 등이 발주한 1~3년 단기 연구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하는 비정규직 위촉연구원들이 많은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선 인건비 문제가 가장 크다. 정규직 전환에 따른 인건비 부담은 고정적이지만 수탁용역 수입은 매년 유동적이다. 하지만 정부는 인건비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기관 입장에선 적극적으로 정규직 전환을 꾀하기 힘들다.

가이드라인 자체가 기관장이 입맛에 맞게 정규직 전환을 해석할 여지를 준 측면도 없잖다. 박 집행위원은 “업무가 일시ㆍ간헐적인지, 상시ㆍ지속적인지 평가해 상시ㆍ지속적이라면 전환하라는 게 가이드라인의 취지”라며 “그러나 기관장들은 업무가 아닌 ‘사람’을 심사해 비정규직을 쳐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1년여에 걸친 정규직 전환 이후 불거진 문제를 해결할 ‘포스트 전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장원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이드라인은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에, 결국 전환에 실패해 짐을 싸야 하는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별도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일정기간 새로운 직업을 찾을 때까지 사회적 배려를 해주는 방안 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무고한 탈락자나 희생자가 구제될 수 있도록 별도의 정규직 전환 재심 절차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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