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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원사의 화분, 삭막한 엘리베이터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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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정원사의 삐뚤빼뚤 손글씨
“탈 때마다 ‘아빠 미소’ 짓게 돼요”
고양시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
제안 이틀 만에 600가구가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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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너무 못 불러요” “흡연 말라”
불편 호소엔 공감 메모 줄 잇기도
“다른 집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 마세요”
웃기고 황당한 상황도 종종 벌어져
경기 부천시 중동에 사는 길의준(33)씨는 요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즐겁다.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화분 덕분이다. 길씨가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화분을 발견한 건 지난달 16일. 누가 깜빡 두고 내렸나 싶어 다가가 보니 벽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저는~ ‘꼬마 정원사’입니다. 눈으로만 봐 주세요. 꽃 이름은 ‘아스타’.” 길씨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면서 “거의 매일 힘들고 지친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화분이 등장한 후부터 탈 때마다 아빠미소를 짓게 된다”고 말했다.
삭막한 철재 엘리베이터에 생기를 불어넣은 ‘꼬마 정원사’의 정체는 3층에 사는 김강후(8)군. 매주 화분 가꾸기 수업을 듣는 강후는 첫 작품인 아스타 화분에 이어 지난주엔 허브 화분을 놓아 두었다. 사람들이 화분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꼬마 정원사’는 수시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흙을 만져보고 꽃의 상태를 확인하며 물을 줬다. 8월 한 달은 쉬고 9월부터 다시 새 화분을 ‘전시’할 계획이다. 김군의 어머니 심혜라(42)씨는 “주민들이 칭찬과 인사를 건네니까 아이도 좋아하고, 이웃과 소통하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층을 오르내리는 이동 수단 외 별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용기를 내 벽보를 붙이고 사연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 접한 주민들은 저마다 손글씨 댓글로 화답을 한다. 지긋지긋한 폭염도 잊게 하는 훈훈한 이야기들, 엘리베이터에 걸린 벽보를 들여다보면 세상은 아직 살만 해 보인다.
지난달 29일 오전 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 단지. 총 30개의 엘리베이터에 주민이 쓴 제안서가 일제히 붙었다.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경비원들의 근무 환경을 위해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자는 내용의 제안은 이틀 만에 전체 966가구 중 600여 가구의 동의를 얻어냈다. 제안을 한 정모(34)씨는 “대부분 고령인 경비원들이 나무 그늘에서 폭염을 피하는 걸 보고 한시가 급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에 벽보를 붙이게 됐다”고 말했다. 주민 김모(45)씨는 “요즘 경비 아저씨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엘리베이터에 붙은 제안서를 보고 너무 반가워 곧바로 서명했다”고 말했다. 10%가 넘는 주민의 청원을 확인한 관리사무소는 주민투표에 이어 임시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설치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울산 울주군의 한 아파트 주민 강수광(36)씨는 지난달 초 엘리베이터에 붙은 벽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을 가리켜 “먼 친척보다 가까운 분들”이라고 표현한 벽보에는 “오늘부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용지 여백에는 ‘좋아요’와 ‘♡’ 등 주민들이 적은 손글씨 댓글이 다수 눈에 띄었다. 강씨는 “벽보를 본 후 나부터 주민들과 웃으며 인사하게 되고 더 가까워 진 것 같다”고 전했다.
이 밖에 엘리베이터에서 주운 현금이나 풍선껌의 주인을 찾는 손글씨 메모, 자신이 키운 화분을 드린다는 쪽지 등으로 소소한 감동을 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금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엔 무슨 사연이 걸려 있을까.
#불편해요… 호소문도
훈훈한 사연만으로 마무리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웃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경우는 늘 있다. 비슷한 피해를 경험한 이들도 적지 않다 보니 호소문 한 장에 다양한 호응 문구가 따라 붙기도 한다. 지난달 초 경기 남양주시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흡연 피해 호소문이 붙자 그 주변에 “타인에게 민폐 끼치며 살지 맙시다” “저 가족은 얼마나 힘들면 저러겠습니까” 등 다른 주민들의 공감 메모가 줄줄이 붙었다.
대구 동구의 한 아파트 주민은 지난 4월 이웃의 고성방가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문구를 넣었다. “노래 너무 못 불러요… 노래 연습은 노래방에서 해 주세요”라고. 황당한 호소문도 눈에 띈다. “다른 집의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하지 마세요. 제발!!” 대전에 거주하는 이은지(22)씨는 “어떻게 하면 옆집 블루투스에 연결되나 싶어 웃겼다”고 전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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