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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불쌍해라, 키가 그렇게 작아…” 무심히 던지는 상처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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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배우는 학교
‘땅콩’이라 부르고 때리기 예사
또래 아이들 조롱에 눈물의 나날
계단 책상 등 모두 극복의 대상만
더욱 험난한 세상
“원래 그래? 엄마가 장애인이야?”
낯선 사람들 질문 공세에 숨막혀
마음의 문 닫은 채 은둔생활까지
부딪혀야만 바뀐다
뮤지컬서 왜소증 장군 역 맡거나
건축사 통해 능력 인정받는 등
‘독보적인 나’를 찾는 사람들도
1980년 초 전북 군산고 주변 나무들은 돌팔매질의 표적이었다. 고교 2학년, 신장 136㎝의 김현수(당시 19세)군은 날마다 돌을 던졌다. 5m에서 시작해 10m, 그리고 나중에는 20m가 넘는 거리에서도 백발백중이 됐을 무렵, 표적은 나무에서 사람으로 바뀌었다. 움직이는 사람은 나무와 달랐지만, 그래도 서너 번 던지면 한번은 맞았다. 김군은 그렇게 돌을 맞은 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주먹다짐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현재 군산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한국저신장장애인협회 (Association Little People of KoreaㆍALPK) 김현수(58)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비슷한 또래는 물론 나보다 어린 애들도 나를 놀리고 도망가면 내 다리가 짧아 달려가 잡을 수가 없었어요. 도망치던 놈들이 돌에 맞으면 싸움을 하러 올 테니 돌을 던지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렇게 돌을 맞췄고, 피 터지게 싸웠죠.”
동네 형, 누나들도 가족 같은 시골 마을에서만 자라다 1969년 군산에 있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처음 낯선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주위의 수군거림은 그에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다. 아홉 살이 돼서야 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또래보다 한참 작은, 다섯 살 아이의 키에 머물러 있던 그가 가진 가장 위력적인 ‘방패’는 전교 1등도 어렵지 않았던 우수한 성적. 그래도 수시로 침투하는 조롱의 시선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돌팔매질로 각인된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성적도 떨어졌다. 2남2녀 중 장남이었던 그에게 “너는 존재 자체가 온전한 형제들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라는 압박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구상까지 불사하게 만들었다. 고3이 돼서 허겁지겁 다시 책을 편 그는 모 대학 약대에 합격했지만 곧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실습 테이블이 키에 맞지 않아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 학교측 답변이었다. 대신 학교 측은 장학금을 지급해 줄 테니 건축학과에 입학하길 권유했고,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교회에 갈 때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는 신에 대한 원망과 함께 “죽으면 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반복했다고 한다.
왜소증이란
키가 큰다는 것은 관절에 있는 성장판 연골의 세포가 자라면서 뼈가 되는 과정이다. 같은 성별 또래 아이들 100명 중 3번째 이내로 키가 작으면 저신장(단신)으로 분류되지만 그렇다고 실제 몸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신장을 기준으로 장애를 판정하는 ‘왜소증’은 지체장의의 한 종류로 분류되며 남성은 성장이 멈춘 만 18세 이상의 성인 중 145㎝이하, 여성은 성장이 멈춘 만 16세 이상 성인 중 140㎝ 이하인 경우다. 연골무형성증으로 인한 왜소증 증상이 뚜렷하면 만 2세 이상부터도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원인은 매우 다양한데 유전 질환만 그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 대부분 희귀 난치성 질환에 속하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김 회장처럼 연골세포의 증식과 분화가 억제되는 연골무형성증이다. 연골저형성증, 골형성부전증, 구루병 등도 저신장을 초래한다. 치료법이 없지는 않다. 뼈를 자른 후 일리자로프라는 고정 기구를 이용해 최대 10㎝ 가량까지 매일 1㎜씩 그 간격을 벌려 뼈가 다시 붙도록 하는 사지 연장술ㆍ교정술 등이다. 그러나 수년간의 치료기간, 수술과 간병 등에 드는 수천만원이 넘는 비용, 무엇보다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는 합병증의 위험 부담이 만만찮다. 그런 것에 비해, 효과는 크게 높지 않다.
2011년 4월 일선 병ㆍ의원에서 담당하던 장애등급 판정 업무를 국민연금공단이 맡은 이후 현재까지 보건복지부에 왜소증으로 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은 모두 1,235명.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왜소증 장애인의 숫자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소증을 가진 이들은 “스스로 사회로부터 숨었거나 부모에 의해 사실상 숨겨진 왜소증 장애인도 많아 정확한 현황 파악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숨거나 숨겨지거나
왜소증 장애인들은 처음 맞닥뜨리는 사회인 학교에서 김 회장처럼 좌절을 배운다. 2006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김지영(가명ㆍ20) 양은 어머니처럼 연골저형성증을 갖고 태어났다. ‘땅콩’이라 부르고 때리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늘어가면서 지영양은 울다 겨우 잠들어도 이불에 실례를 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의 어머니는 “딸의 야뇨증을 고쳐보려 한 밤에 몇 번씩이나 억지로 깨워 화장실에 보냈다”고 했다. 단지 또래의 괴롭힘 만이 아니다. 교정의 계단, 교실의 책ㆍ걸상, 화장실 변기 같은 일상의 도구조차 그들에겐 극복의 대상이다.
학교 밖 세상은 더욱 험난하다. 대중목욕탕에 가기라도 하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몸이 원래 그런 거냐” “수술을 받은 거냐” 같은 질문을 받는 건 예사.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가 연세가 많은 승객들이 “아유 불쌍해라, 어쩌다 이렇게 됐니” “이쁜 데 시집은 갔냐” “‘엄마가 장애인이냐” 같은 말을 던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ALPK 모임에서 공유된 왜소증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수기에는 “우리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정신장애를 가졌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 같다”는 울분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다른 왜소증 장애인마저 밀어내기도 한다. 14세가 돼서야 ALPK 모임을 통해 자신이 구루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교정술을 까지 받게 된 김학휘(31)씨는 한때 ‘ALPK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이내 접었다고 한다. 김씨는 “우연히 만난 왜소증 장애인들에게 모임을 소개하면 ‘난 정상인으로 생각하고 잘 사는데 왜 건드리냐’는 반응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며 “마치 자석의 N극이 N극을 멀리하는 것처럼 우리 중 누군가도 서로를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씁쓸해 했다. 연골무형성증을 갖고 있는 자녀를 둔 김영석 ALPK 서울지부장은 이런 반응을 “외면하던 거울을 보는 효과”라고 설명한다. 김 지부장은 “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부모들은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자기 아이의 처지를 그제야 실감하고 대성통곡한 후에야 마음의 문을 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은둔을 벗어나 세상으로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편견의 공격을 받은 모든 왜소증 장애인이 자신의 상황을 마주하지 못한 채 ‘그들 만의 세계’에서 은둔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해가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이들도 있다. H그룹 계열사 인재개발팀에서 임직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이지영(34ㆍ연골저형성증)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화장실만 가면 모두들 나를 구경하며 놀려서 수업시간에만 손을 들고 화장실을 갔다”며 “계속 피할 수는 없는 일이라 당당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체육시간에 혼자 교실에 남지 않고 뭐든 할 수 있는 건 운동장에서 함께 했던 게 작은 전환점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학급 임원, 친구들과의 댄스 장기자랑 출연, 대학 과 대표, 호주 어학연수와 60개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문을 두드리며 그는 도전을 이어갔다. 이씨는 “아직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고 부딪히는 단계에 불과하지만 비슷한 어린 친구들을 볼 때마다 질릴 정도로 밖으로 나가 부딪혀야만 바뀐다고 얘기한다”며 “상처를 무서워만 하지 말고 다시 치유하는 과정 그 자체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정체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은 키를 강점으로 여기고 사는 이도 있다. 왜소증을 갖고 있는 김유남(26)씨는 8월 초 막을 올리는 뮤지컬 ‘바넘(BARNUM)’에서 조연인 왜소증 장군 ‘톰 섬(Tom Thum)’ 역을 맡았다. 그는 신체적 차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게 되는 상황과 왜소증 인물 역할에만 묶이는 것에 대한 부담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나를 독보적인 존재로 각인시킬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왜소증이란 핸디캡 역시 남들이 아닌 나만이 활용 할 수 있는 카드”라며 밝게 웃었다.
김현수 회장 역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배워 나갔다. 그는 “대학 때 건축과라는 이유로 농촌 변소나 우물을 수리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봉사활동을 나가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소질을 발견한 건축사 일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일찍 운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으로서 자리매김했던 순간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는 8월 11일 군산에서 열리는 ALPK의 2018년 여름캠프 준비에 여념이 없는 김 회장은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다”며 “왜소증 장애인들이 더 이상 꼭꼭 숨지 말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군산=글ㆍ사진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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