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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에 웃고, 폐기에 우는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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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는 유통기한이 지나 팔지 못하는 도시락, 삼각김밥, 샌드위치 등을 가리키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사이의 은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폐기는 ‘공짜 밥’으로도 통한다. 지난해 부산지역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 중 54%가 폐기 음식을 먹으며 근무했다는 부산청년유니온의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상품을 팔아 마진을 남겨야 하는 점주들에게 폐기란 그야말로 ‘피 같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폐기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은 편의점이라는 작은 일터에서 공존한다.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 노동자, 입장은 달라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인 이들의 하루하루는 폐기라는 묘한 음식으로 인해 서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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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 갓 넘긴 도시락ㆍ음료 등
버려지는 음식 먹자니 자괴감 들지만
알바생에게는 ‘행복한 공짜 밥’
최저시급보다 비싼 도시락도 나와…
“폐기 파티… 이 맛에 편의점 알바하죠”
“나에게 폐기는 식량이다.” 전북 김제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김철민(20)씨는 “한 끼에 3,000~4,000원 정도 드는 식비를 아낄 수 있으니 폐기가 나오면 무조건 좋다”고 했다. 버려지는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폐기 때문에 탈 난 적도 없고,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최저시급보다 비싼, 그래서 사 먹을 엄두를 못 낸 음식이 유통기한을 넘기는 순간 공짜가 되는 ‘폐기의 마법’도 아르바이트생들은 즐겁다.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오경진(21)씨는 “언젠가 8,900원짜리 닭강정 도시락이 들어왔을 때 속으로 ‘안 팔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안 팔려서 폐기로 먹은 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라며 웃었다.
최저시급 인상의 역풍 때문인지 아르바이트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요즘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청춘에게 폐기는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게시물 중에는 “이 맛에 내가 편의점 알바한다”거나 “폐기는 행복한 꽁밥”과 같은 ‘폐기 찬가’가 흔하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친구나 가족이 가져온 도시락과 빵, 우유 등을 모아 놓고 찍은 ‘폐기 파티’ 사진도 적지 않다.
세상 유쾌한 ‘폐기 파티’의 이면에는 식대나 주휴수당은 물론이고 최저임금마저 제대로 못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열악한 처우가 숨어 있다. 편의점에 발을 딛는 순간 ‘을’이 되는 현실에서 “시급 외에 다른 수당을 지급할 여력이 없다”는 점주의 미안함은 “폐기 나오면 먹어도 된다”는 허락으로 ‘퉁’쳐지기 마련이다. 식사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카운터를 지키며 적당히 때우기에도 폐기만큼 좋은 음식이 없다. 서울 성북구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박주민(20)씨는 “가끔 사장님이 카운터 봐 주면서 밥 먹을 시간을 배려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서울시내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는 하영은(23)씨는 “편의점에서 주휴수당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사장님들이 수당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되도록 본사에서 충분히 지원을 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역대급 폐기’가 나올 때면 그만큼 손실을 떠안을 점주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씨는 “폐기 음식이 한 번에 10개나 나온 적이 있었는데,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사장님이 걱정되고 불쌍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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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주에게는 ‘피 같은 손실’ 이지만
도시락 개수 줄이면 매상 떨어져
많이 갖다 놓으면 폐기 쌓여서 골치
“적정 발주량? 신도 모르죠…”
차라리 식사로 소비하는 게 속 편해
서울 동대문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오모(31)씨는 가끔 ‘피자치즈돈까스’나 ‘치즈마요롤’ 등 자신의 점포에서 나온 폐기 음식으로 ‘폐기 혼술상’을 차린다. “폐기 음식으로 만든 술안주로 점주로서의 현실을 위로하곤 한다”는 그는 “‘폐기의 딜레마’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폐기가 나도 걱정 안 나도 걱정이다. 폐기가 나는 건 못 팔았기 때문이고 폐기가 안 나면 부족해서 못 판 거니까.”
‘딜레마’라고는 했지만 폐기가 안 나와서 걱정인 날은 드물다. 수북이 쌓인 폐기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씨의 편의점에서 발생하는 폐기 손실액은 한 달 평균 40만~50만원 선, 본사의 폐기 지원 액수만큼을 제하더라도 30만원 정도를 버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주변에 원룸이 많아서 도시락 종류가 잘 팔리지만 정확한 수요 예측이 어려워 필연적으로 폐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기모(38)씨 역시 폐기로 인한 고충이 크다. “오늘 10개 주문해서 다 팔았다고 내일 15개 들여놓으면 10개를 폐기하는 일이 다반사다. 오죽하면 업주들 사이에서 ‘적정 발주량은 신도 못 맞힌다’는 얘기가 돌겠나”라고 했다.
그렇다고 폐기를 줄이기 위해 상품 발주를 적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들여오는 상품이 적으면 더 많이 팔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셈이니 매출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사의 폐기 지원금 역시 점주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기보단 소극적인 발주를 막는 차원에서 지급된다.
인상된 최저시급과 각종 수당 부담 때문에 아르바이트생 고용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편의점을 운영하는 기씨는 결국 폐기 음식을 자신이 먹어 치워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낮 12시에 나오는 폐기는 점심 메뉴, 저녁 8시에 나오는 폐기는 자연스럽게 저녁 메뉴가 된다”며 “월 폐기 손실액이 30만원 정도인데 그냥 ‘내 식대려니’ 생각하는 게 속이라도 편하다”고 했다. 최근 최저시급 인상 등으로 커진 점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편의점 가맹본부들이 상생안을 내놓고는 있지만 실질적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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