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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로 35개국 돌며 함께 고난 극복 “가족의 情 자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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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 삶도 과도기, 돌파구를 찾다
수동적인 아빠, 미래ㆍ진로 고민하는 자녀
“우리 가족만의 시간 만들자” 엄마가 제안
작년 7월 ‘유라시아 횡단 프로젝트’ 시동
캠핑카 인수 후 보완… 물품 지원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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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속내 터놓고 갈등 해결
길 찾기 연속… 사소한 일에 의견 충돌도
주변 신경쓰지 않고 서로의 감정 털어놔
딸은 밝아지고 아들은 적극적으로 바뀌어
“1년 공백 끝 돌아온 일상, 희망이 생겼죠”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1년 살기를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직장, 학교, 가정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멀어졌던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가까이 익숙함을 내려놓는다.
이들은 남이 짜 준 시간표대로 명소에서 사진 찍고, 맛집에서 음식 먹고 돌아오는 보통의 여행과 달리 장소를 옮겨 때론 부지런하게 관광하고, 때론 그냥 느긋함을 즐긴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잘 굴러가나’, ‘학교 진도는 어쩌지’라는 걱정 따위는 어느덧 사라지고 곁에 있는 가족의 말과 행동을 바라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함께 보낸 추억과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가족을 지탱해 주는 에너지가 된다.
캠핑카 타고 유럽 1년 살기 감행하다
경남 김해에 사는 최은수(16)양은 지난해 7월 9일 강원 동해항을 출발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아빠(최경섭ㆍ49), 엄마(이혜경ㆍ46), 오빠(최영수ㆍ20), 그리고 생후 2개월부터 7년 동안 함께 산 강아지(슈)와 함께였다. 이들이 의지할 캠핑카를 실은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기간 1년, 방문 국가 30개 이상의 유라시아 횡단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했다.
소방전기업체에 다니는 40대 후반의 직장인 아빠, 대학과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 엄마, 대학 신입생 아들 그리고 중3 딸. 빡빡한 일상에서 잠시도 신경을 거둘 겨를이 없던 네 식구가 유럽 횡단의 주인공이 될 줄은 본인들도, 주변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캠핑카를 타고 낯선 곳을 향한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이다.
프로젝트는 엄마 이혜경씨가 제안했고 남편, 아들, 딸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작년이 결혼 20주년이었어요. 그동안 네 식구 모두 열심히 살았지만 위기나 갈등이 없지 않았어요. ‘좀 지나면 해결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도리어 더 커졌죠. 다른 가족, 지인들과도 여행을 함께 다녔지만 우리 식구만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각자의 삶도 가족의 삶도 모두 과도기였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가족 모두 한국에서의 1년을 비우는 대신 낯선 곳에서 1년을 채워 보자고 마음먹었다.
가족만의 시간을 얻으려 낯선 곳을 향하다
이씨는 억척같이 살았다. 1994년 대학 졸업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첫째를 낳고 석사, 둘째를 낳고 박사학위를 연거푸 받았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한식, 중식,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2011년부터 강아지와 캠핑 관련 개인 블로그도 운영했다. 가족내 일도 대부분 남편보다 이씨가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빠의 입지가 줄고 부부 갈등이 커졌다. 게다가 자녀들은 다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아빠에 불만이 많았다. “남편이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아빠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눴으면 했죠.”
대학에 들어간 아들에게는 여행을 통해 미래와 진로를 차분히 생각할 ‘갭 이어(gap year)’의 시간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특히 딸에게 1년 비우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갑상샘 기능 저하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피로감을 쉽게 느끼다 보니 무기력하게 처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맺음도 어려움이 많았다. “갑상샘 기능 저하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들 해요. 어릴 때부터 아빠, 엄마 둘 다 밖에서 일하다 보니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 늘 미안했어요. 입시 준비를 위해서는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봤죠.”
유럽에서 1년 살기의 복병은 솅겐 조약
프로젝트는 캠핑카 준비로 시작했다. 유라시아 횡단 경험자를 통해 미니버스를 개조한 캠핑카를 3,000만원에 인수했다. 경남 함안의 전문 업체 브라운모빌과 몇몇 업체에 의뢰해 차량 전체를 점검한 뒤 내부 시설을 보완했고, 유럽이 수질이나 물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정수기를 새로 설치했다. 이 밖에 잠금장치와 커튼을 다는 것까지 해서 약 1,000만원이 들었다. 캠핑카의 타이어는 브리지스톤 코리아가 프로젝트 계획서를 검토한 뒤 제공해 줬고, 다른 물품도 몇 군데 업체로부터 지원받았다.
다음은 일정 짜기. 고려 사항이 여러 가지다 보니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게 솅겐 조약. 유럽 26개 국가가 여행과 통행의 편의를 위해 맺은 협약인데, 조약 가입국을 출국할 경우 그 날짜로부터 180일 전을 기준으로 최대 90일만 협약 맺은 나라에서 머물 수 있고, 나머지 기간은 조약 미가입국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금을 물기 때문에 조약 가입국과 미가입국의 방문 순서 배열에 많은 신경을 썼다.
또 서유럽은 캠핑카를 위한 캠핑장이 잘 갖춰져 있는 반면 동유럽은 그렇지 않다는 점도 참고해야 했다. 특히 반려견과 함께하기 때문에 예방접종 증명서, 반려동물 여권 등 준비할 게 많았다.
길에 빠진 캠핑카 꺼내 준 고마운 리투아니아인들
오전 8시에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해 먹고 오전 10~11시에 나서 구경을 한 뒤 점심 겸 저녁은 외식하거나 물가가 비싼 지역에서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나름 꼼꼼하게 준비했다고 하지만 은수 가족은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언어 장벽은 그나마 번역기와 보디랭귀지로 해결할 수 있어 난이도 ‘중’에 해당했다.
운전을 도맡다시피 한 아빠 최씨는 할 말이 많았다. 유럽의 좁은 도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처럼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잘 돼 있지 않다 보니 길 찾기의 연속이었다. “인터넷 연결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어 전 세계 여행자들이 많이 쓰는 오프라인지도 맵스미(Maps.me)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했는데도 갑자기 시골길로 안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리투아니아에서는 차바퀴가 무른 땅에 빠지는 바람에 온 동네 분들이 처음 보는 저희를 돕겠다고 나서기까지 했죠. 자신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끌고 왔다가 소용없자 큰 트랙터가 있는 지인에게 직접 연락해 도움을 청하기도 했죠. 너무 고마웠어요.” 알프스 인터라켄을 지날 때는 제일 험하다는 그림 젤 패스를 피한다고 했는데 막상 바로 그 길 말고 대안이 없어 아찔한 운전을 해야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로 이동 중에는 강도를 당했다. 너무 피곤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잠을 자는데 사복 차림의 남성들이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들이닥치더니 손전등을 들고 캠핑카 곳곳을 뒤졌다. “마약 수색을 하는 경찰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강도로 돌변했습니다. 그날따라 현금을 차 안에 많이 두고 있었는데 제법 큰 돈을 가져갔죠. 새벽 3시였죠. 아침에 경찰에 신고했지만 소용없더군요.”
직접 부딪혀 마음속 갈등을 해결하다
설상가상 남매는 번갈아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남들은 부러워할 유럽 횡단이라지만 노면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을 하루에 수백㎞ 이상 달려야 하는 단조로운 패턴을 힘들어했다. 좁은 캠핑카 안에서 네 식구가 좋으나 싫으나 붙어 다니다 보니 종종 사소한 일에 의견 충돌이 생기기도 했다.
해답은 부딪혀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혜경씨는 낯선 곳에 머무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 답답한지, 아쉬운지 서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것들을 속 시원히 풀어내고 나니 서로 조금씩 더 이해할 수 있었죠.” 특히 조지아에서 함께 스키 강습을 받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인상적이었다. 중간중간 다른 가족과의 만남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해 줬어요. 같은 내용이라도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다 보니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더라고요.”
꼭 미리 짠 일정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가 보고 좋으면 더 머물고 그래도 좋으면 더 있는 식이었다. 러시아, 모로코, 터키, 조지아, 스페인에서는 다른 곳들보다 긴 한 달 가까이 지냈다.
다시 돌아온 일상, 그러나 달라졌다
예정보다 많은 35개 나라, 6만㎞ 가까운 거리를 돌아본 네 사람의 ‘낯선 곳 1년 살기’는 6월 다시 캠핑카를 타고 동해항으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됐다. 캠핑카 비용을 뺀 순수 경비만 약 8,000만원이 들었다.
이들 가족은 1년 동안 비워뒀던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딸 은수양은 9일부터 다시 학교도 나갔다. 사실 떠나기 전만 해도 학교 생활을 힘들어했고, 돌아와 중3을 다시 다닐지 검정고시를 볼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지내며 비록 1년 후배들과 함께라도 학교에 다녀보겠다고 결심했다. 이혜경씨는 아들 딸 모두 1년 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 1년을 한국이 아닌 유럽에서의 삶으로 대신 채웠고 또 다른 성장을 했어요. 유럽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줬는지 독립성이 강해진 것 같아요. 스스로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부부 사이도 부모 자식 사이에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자랐다고 한다.
유럽에서 1년 살기를 통해 이들 가족은 많은 것을 함께 경험했고 공감대를 이뤘다. 가족이 함께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씨는 ‘슈와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유라시아횡단여행’ 이라는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차곡차곡 남겼다.
이혜경씨는 1년 공백 끝에 돌아온 일상은 더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고 했다. “가족의 내밀한 부분까지 공개한 것은 저희와 같은 상황에 처한 분들도 한번쯤 고민해 보길 권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단 긴 시간 함께 있다 보면 더 힘들 수도 있으니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김해=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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