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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주고나면 노후 걱정” 효도를 계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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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식에 재산 주며 부양 요구
조건부증여 ‘효도계약서’ 늘어
# 2
“땅ㆍ집 넘겨줬는데 약속 어겨”
계약서 없이 증여해 법정다툼도
작년 부양료 청구 등 사건 255건
# 3
‘교회 동행ㆍ식사’ ‘일주일마다 전화’
계약 조건에 소소한 바람 담기도
일부 재력가는 절세 재테크 활용
‘아들 소유권ㆍ부모 임대료’ 계약도
#1. 법정에 선 두 노인. 원고ㆍ피고석에 앉은 80대 노모와 60대 아들은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 정순남(87ㆍ가명)씨는 노후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18억원 상당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는 둘째 아들이 한집에 살며 봉양했다. 불행은 둘째 아들이 말기암 판정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큰아들 이진헌(65ㆍ가명)씨는 “앞으로 제가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정씨에게 농지 소유권을 요구했다.
“나는 죽기 전까지 재산 안 물려준다. 끝까지 효도한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더 물려주고 싶구나.” 정씨는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과거 이씨는 “(사업을 하려는데) 나는 땅이 없어서 대출을 못 받는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어머니 면전에 골프채를 휘두르거나 칼을 불에 달궈 자해한 적이 있다. ‘10년도 더 된 일인데 이제 철이 들었겠거니’ 했다. 땅을 넘겨주자 이씨는 ‘혼자 사시던 집으로 돌아가라’며 정씨를 외면했다. “용돈은 한 푼도 주지 않았어요. 농사지을 땅만 주려고 했는데 주변 땅까지 통째로 빼앗겼습니다.”
괘씸히 여긴 정씨는 재산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부양을 조건으로 땅을 줬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큰아들을 상대로 땅 반환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정씨의 노여움을 풀어주지 못했다. 재판부는 “증여계약을 체결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겠다’, ‘용돈을 드리겠다’는 의무를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아 효도계약이 존재한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봤다. 이후 조정이 성립해 증여를 유지하고 대신 이씨가 매월 100만원씩 용돈을 보내기로 합의했지만 금이 가버린 모자(母子)관계는 끝내 회복할 수 없었다.
#2. 재산을 담보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일도 있다. 80대 허창현(가명)씨는 2009년 손자에게 지방의 땅과 그 위에 지은 주택을 물려줬다. 이후 ‘효도계약서’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3년 2월 손자부부를 불러 계약서를 썼다. “할아버지를 성심껏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만약 손자 부부가 부양의무를 저버리거나 이혼ㆍ별거 등 가족 상호간의 심각한 다툼을 할 경우 증여를 취소한다. 또 증여에 따른 모든 이익금을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손자부부는 그러나 허씨의 소망을 이뤄주지 못했다. 이들은 2015년 이혼하기로 했다. 물려받은 땅과 주택은 이미 판 상태였다. 허씨는 “이혼하지 않는 조건으로 줬던 부동산 가격인 4억2,000만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갈라선 손자부부는 합심해서 허씨에 맞섰다. 이들 셋은 결국 법원에서 만나야 했다. 법원은 재산을 물려준 지 4년 뒤에야 작성된 이 계약서는 효력이 없다고 봤다. 손자가 이혼금지조항에 동의했다고 볼 근거가 없어서다.
법의 영역으로 들어선 ‘효도’
사랑의 발현인 효도가 계약서 위에 올라왔다.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예로부터 한국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윤리 규범이었다. 부모자식 간에는 천륜지정(天倫之情)이 있다고 믿어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부모와 자식은 돈 때문에 ‘갑을관계’에 놓이기도 하고,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로 만나기도 한다. 부모는 재산을 담보로 효를 요구하고, 자식은 대가를 바라며 효도하는 효도계약서에서 진정성을 찾기는 어렵다.
6일 대법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부양료 청구 및 부양의무자 지정ㆍ변경ㆍ취소 청구 사건은 2015년 229건, 2016년 243건, 지난해 25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차마 법적 대응으로 나서진 못한 채 가슴앓이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부양 관련 법률상담 건수는 2010년 60건에서 2013년 134건으로 2배 이상 늘었고 2016년에는 183건에 달했다. 이들 중 다수는 부모가 재산을 앞서 내놓았음에도 부모를 돌보지 않으려는 자식에 대한 다툼과 갈등이다.
도덕의 영역에 머물던 효도가 어쩌다 법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오게 된 걸까. 전문가들은 사회구조 변화와 부양에 대한 가치관 차이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늘어난 기대수명에 비해 은퇴연령이 빨라지며 부모 세대는 노후준비를 미처 하기도 전 일터를 떠난다. 자녀교육에 올인하며 부모까지 모신 이들 이중부양세대는 노후에 자식들에게 부양받을 것을 기대했다. 반면 평생직장은커녕 취직도 쉽지 않은 시대를 견디느라 자식 세대는 결혼과 출산으로 가족을 확대하길 점차 포기하고, 나아가 부양을 우선순위에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곤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법률구조부장은 숱한 상담을 통해 부양에 대한 세대 간 온도차를 실감했다.
“급속한 산업화시대를 살아낸 베이비붐세대는 자신들이 부양하던 부모에게 용돈을 주면서 자식도 양육했습니다. 그러니 노후자금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자식에게 미리 물려주면 자식이 내 노후를 책임져 주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자식들은 증여를 받으면 ‘부모님에게 잘해야지’ 하는 마음을 품지만 현실은 먹고사는 일부터 막막합니다. 이들에겐 ‘부모에게 용돈을 준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지요.”
핵가족화 때문에 줄어드는 친밀감
핵가족화 등 가속화되는 가족 해체 분위기가 가족 구성원간 친밀감을 약화시켰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다. 베이비붐세대(1945~1960년 출생)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 교류가 많았던 반면, 핵가족화가 진행된 밀레니얼세대(1982~2000년 출생)는 교육에 매진하느라 정서적 친밀감을 충분히 쌓지 못했다. 박소현 법률구조부장은 “핵가족 사회에서 자란 젊은 세대는 인성교육이나 정서적 교류가 결핍돼 있다”면서 “자식을 키우면서 ‘일과 교육’에 몰두하느라 못했던 걸 계약조건으로라도 요구하고 싶은 부모들의 욕구가 발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담소에 와서야 털어놓는 조건은 꽤 사소하다. ‘주말에 함께 교회에 갔다가 식사를 같이한다’거나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라’와 같은 내용이다. 이는 성장과정에서 부모자식 간에 정서적 친밀감이 형성돼 있다면 계약까지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자식에게 상속 등의 보답으로 정서적 부담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들도 많다. 1남1녀를 둔 한 50대 여성은 말했다. “우리는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가족을 위해 희생했지만, 우리 자식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요.”
“변호사님이 대신 말해주세요”
효도계약서를 떠올리더라도 자식들에게 “계약서 쓰자”고 말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부모자식 관계는 복잡미묘해 말 한 마디에 ‘부모님이 나를 못 믿나. 나를 이기적인 자식으로 생각하나’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그렇다고 아무 조건 없이 전 재산을 주자니 노후걱정이 막막하다.
그래서 효도계약서를 권유하는 건 변호사의 몫이 된다. 법무법인 세종 김현진 변호사는 “증여계약을 할 때 ‘부양 조항을 쓰도록 자식에게 대신 권유해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고 전했다.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재산을 생전에 물려줄 때 계약서에 ‘원래 이렇게 많이들 한다’고 양쪽에 권하곤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만에 하나 자식의 마음이 바뀔 염려를 덜 수 있으니 좋습니다. 자식 입장에서는 ‘부양 조건이 잘 지켜지기만 하면 이 계약서가 문제 될 일이 없는 가족만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니 불필요한 오해를 안 하게 됩니다.”
재력가들 사이에선 효도계약서가 ‘절세(節稅)’를 위한 묘책으로도 활용된다. 재산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부동산이나 주식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 물려주는 게 자식의 세부담을 줄이는 방법으로 통한다. 법률상 증여 계약이지만 계약을 체결하는 주체가 부모와 자식이고 계약 내용에 증여(상속)시점과 관련한 ‘조건’이 붙으면 형식은 효도계약서로 본다.
김현진 변호사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상속이 이뤄지면 시점에 따라 감당할 수 없는 세금이 부과되는 반면, 미리 타이밍을 조절해 증여하면 세금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증여세는 원칙적으로 증여가 이뤄지는 시점의 가치로 세금을 매깁니다. 이 때문에 주가가 폭락하면 주식 증여가 상당히 많이 이뤄지지요. 죽는 시점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 주가가 낮을 때 미리 증여하는 겁니다.”
값이 계속 뛰는 부동산은 차이가 더 크다. 부동산 공시지가가 5~10% 오르면 미리 증여했을 때보다 세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김 변호사는 “자식이 확실하게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면 생전에 증여하는 게 자식의 부담을 덜어주는 셈”이라며 “다만 조건 없이 몽땅 물려주면 노후가 막연해지니 효도계약을 체결한다”고 말했다. 대개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부동산에 대한 관리ㆍ처분권한은 부모에게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쉽게 말해 “소유권은 넘겨주되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매월 임대료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부모가 쓴다”는 말이다. 노후대책을 위해 명시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자산을 보유한 70대 A씨가 이 방식을 택했다. A씨는 지난해 월 임대료만 1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그는 증여계약서에 “별도의 약정이 있을 때까지 부동산 임대료는 내가 관리한다”고 적었다. 소유권을 주되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려는 A씨만의 방법이었다. A씨 아들은 증여세를 내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A씨는 월 임대료를 받아 일부를 아들이 갚아 나갈 원금과 대출이자 명목으로 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관리하고 있다.
차비 쥐여주고 자식 방문 기다리는 부모
요즘은 자식 내외가 방문할 때마다 용돈을 주는 부모들이 늘었다. ‘재산 물려줬으니 찾아오라’는 건 극소수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데다 ‘도장까지 받아 봤자 소용없더라’는 인식이 퍼지면서다.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복을 누린 뒤 돌아가는 길 마음을 푼푼하게 만들어 주자는 심산이다. 증여계약서를 쓰고 조건을 명시하는 주고받기(give and take) 방식보다 훨씬 정감 넘친다.
서울에 사는 김은정(32ㆍ가명)씨는 주말마다 남편과 딸을 데리고 청담동 시댁을 찾는다. 시부모님은 부족함 없이 사는 자산가이지만 김씨 부부가 특별히 물려받은 것은 없다. 돈이 개입되면 부모자식 관계조차 어색해질까 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김씨는 짐작한다. 대신 방문할 때마다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을 봉투에 담아 쥐여준다. “아들, 며느리, 손녀 보고 싶으셔서 매주 함께 식사하자고 부르세요. 돈 때문에 찾아뵙는 걸로 비칠까 봐 부르시지 않는 날도 가요. 하지만 많이 부담됩니다. 친한 친구들도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데, 주말마다 아이 준비시켜 외출하려면 쉴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성수동에 사는 사업가 지준기(59)씨도 주말마다 집에 다녀가는 자식들에게 차비를 챙겨준다. 5~10만원 정도의 많지 않은 금액을 주는 데에는 자발적 효심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다짐도 깔려있다. “마음은 계약서 쓴다고 생기는 게 아니에요. 자식들에게 돈만 주다 보면 마음이 멀어집니다. 상추도 뜯어 주고 얼마 안 돼도 차비를 챙겨주는 게 마음의 표현이지요. 자식들이 자발적으로 오도록 부모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두 아들에게 “앞으로 물려줄 거 없다”고 선언했지만 아들부부는 꾸준히 부모를 찾는다. “내가 이렇게 하니 용돈 주는 친구들이 늘고 있어요. 자식들과 멀어진다고 푸념하길래 ‘안 온다고 서운한 소리만 하지 말고, 오도록 유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자식들이 오지만 가을에 손주 낳으면 우리가 갈 거예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과 정(情)
전문가들은 돈이 아닌 행복한 삶을 유산으로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년에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행복을 찾는 노력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가정사건을 다수 처리한 노영희 변호사는 “자식에게 이만큼 투자했으니 효도 받겠다는 채권자의식을 버리고 자신감 있는 삶을 물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40~50대만 하더라도 관심과 돈을 자식에게 쏟아 붓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나를 부양할 거라는 기대감은 매우 적습니다. ‘내 노후는 내가 대비한다’고 생각하지요. 고령화 사회에서 부양 문제를 자식에게만 맡기려고 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다행히 아직 살 만한 세상인 걸까. ‘효도’라는 따뜻하고 신성한 두 글자 뒤에 ‘계약’이라는 매정한 단어가 따라 붙은 걸 애석하게 보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려 보기만 했다’는 한 40대 남성은 “사심도, 대가도 없이 자식을 길러주신 부모님이 노년에 효도를 받으려 계약서까지 동원하는 현실이 서글프다”며 말을 멈췄다. “성장하는 동안 물질적으로 못 해 주신 건 많지만 그분으로서는 쏟을 수 있는 가장 큰 정성을 쏟아 키워주셨고 많이 고생하신 걸 압니다. 부모님을 굉장히 존경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전화 드리고 찾아뵙거든요. 나중에 자식들도 저를 이런 마음으로 찾아와 줬으면 좋겠지, 돈을 준다고 찾아오면 슬플 것 같아요.”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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