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바람 나서 가족 외면한 아빠, 결혼식에 불러야 할까요”

입력
2018.07.09 04:40
수정
2018.07.17 08:05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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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일러스트=박구원기자
일러스트=박구원기자

# 춤과 음악이 좋다며 가정 뒷전

동생 학교 마치고 나니 본색이

생활비 안주고 대놓고 외도…

엄마는 ‘천륜’이라고 이해하라며

예비 시댁에 밉보일까 전전긍긍

저희 집은 화목한 가정이었어요. 엄마가 가끔 병원신세를 질 때도 있었지만 남동생과 저는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컸다고 생각해요. 아빠가 춤바람이 나기 전까지는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집안의 어른이 된 아빠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늦게까지 놀다 들어오는 아빠를 매일 밤 기다렸어요.

아빠는 춤과 음악이 좋다고 하면서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중학생 때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울면서 힘들어 하던 엄마 얼굴이 선해요. 아빠는 몸이 안 좋아 수술을 한 엄마를 두고도 춤을 추러 가던 사람이었어요. 제가 대학생이 될 때쯤 아빠가 다시 가정에 충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땐 아빠의 외도 사실을 들켜 엄마의 비위를 맞춰 준 거라는 걸 뒤늦게 들었어요.

동생까지 학업을 마치고 나니 아빠가 본색을 드러냈어요. 엄마에게 생활비를 안 주기 시작했어요. 그 즈음 아빠의 외도도 알게 됐어요. 성인이 된 후 알게 됐어도 충격이 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빠는 유흥 그 자체에 빠져 있었어요. 저희 몰래 대출 받아 치장하고, 내연녀와 데이트하는 데 썼더군요. 아빠는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다”며 소위 말해 배째란 태도였습니다. 이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저와 동생이 엄마를 설득했어요. 엄마는 서로 상처가 남지 않는 방법으로 빠르게 마무리 하자며 합의 이혼을 택했습니다. 재산도 분배했어요. 아빠는 이 상황에도 이사할 집이 구해질 때까지 저희와 지내겠다며 두 달을 더 머물렀어요.

고민이 되는 건 제 결혼이에요.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을 지켜봐 준 남자친구가 있어요. 연애초반에는 남자친구가 취업과 독립, 아버지와의 갈등 문제로 제게 많이 의지했고, 최근 저희 집 일로 힘들 때는 남자친구가 제게 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내년 봄 상견례를 계획하는데 엄마가 길게 봤을 때 절 위해서라며, 결혼 과정에 아빠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엄마는 무엇보다 제가 나중에 후회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해요. 엄마와 아빠는 남남이 되지만, 부모 자식 간은 천륜이라고요. 지금은 화가 나도 나중에 아빠가 병 들거나 돌아가시면 그 때 제가 겪을 후회가 걱정된대요. 아빠가 철이 없기도 하고, 엄마의 속을 많이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딸로서 이해하라고 했어요. 소소한 일상도 보고받을 정도로 엄마는 제게 많이 의지하시는 분이에요. 엄마 말도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감정적으로 너무 힘듭니다.

이제 와서 남자친구 부모님이 저희 부모님 이혼을 흠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도 들어요. 엄마가 이혼을 고민한 것도 결혼을 앞둔 제가 혹시라도 예비 시댁에 밉보일까 염려돼서였어요.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보수적인 분이라고 들었어요. 자식들을 두고 “나처럼 고생하지 않으려면 너흰 내가 제시한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에요. 남자친구가 어릴 때부터 진로문제로도 많이 싸웠고, 항상 아버지 기대에 미치지 못해 갈등이 많았나 봐요. 하지만 최근에 이직과 전업을 고민하던 남자친구가 아버지의 이야기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라며 약간 마음을 연 것 같아요.

한 인간으로서 아빠라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아빠를 결혼식에 불러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최지예(가명ㆍ28ㆍ사회복지사)

# 한량 아버지 때문에 고생해 온

엄마 감정까지 딸에게 투영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 쌓여

결혼은 부모로부터의 진정한 독립

지나친 미움은 독… 조금 내려놓길

지예씨의 사연을 읽으며 저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지예씨는 왜 이렇게 아버지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결혼식에 아버지를 부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거부이자, 더 나아가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기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여요. 심지어 지예씨가 말했듯이 아버지의 외도로 가장 힘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약간의 자비마저도 단절하고 싶어할 정도로 굉장히 아버지를 미워합니다.

유흥과 외도를 일삼은 아버지가 지예씨에게 상처를 줬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성인이 된 지금도 가정을 소홀히 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심정을 느낄 거예요.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나도 아버지를 버릴 거야’라는 마음이 내재돼 있는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지예씨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사용한 건 아니었어요. 지예씨 아버지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주 조금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어하지 않는 지예씨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예씨 아버지는 옛날부터 쓰인 표현을 빌리면 한량이에요. 나이에 맞지 않게 철이 없고, 노는걸 좋아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이에요. 즐거움과 쾌락만을 추구하던 아이들도, 만 세 살만 되면 인내하는 법을 조금씩 배웁니다. 성인이 되면 조절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지예씨 아버지는 배우자와 자녀가 있음에도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아버지를 견뎌내며 살아 온 지예씨 어머니는 그래서 아버지에게 양가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남편의 외도는 어머니에게는 수모를 겪는 것과 같아요.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도 떨어지는 일입니다. 이런 배신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겪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여성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며 이혼을 하고 싶다고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새로운 여성을 통해 재미를 느꼈던 걸로 보여요. 지예씨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언젠가 남편이 가정에 돌아올 것이라 생각해 꿋꿋하게 참으며 버텨온 것 같아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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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지예씨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이유는 배우자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은 깊은 좌절감 때문이에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확인 받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딸에게만큼은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은 마음이에요. 지예씨의 일상을 보고 받듯이 챙기는 건 역설적으로 어머니가 자신을 챙겨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직접적으로 자신을 돌봐달라고 얘기하는 방식 대신, 지예씨를 지나치게 챙기고 약간은 통제하는 방법으로 어머니는 지예씨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예씨는 왜 자신이 어머니 당사자가 되어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것만큼의 분노를 느끼는 걸까요? 물론 지예씨 아버지는 지예씨가 얼굴을 보기도 싫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쁜 아버지였어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해자고, 어머니는 안쓰럽습니다. 하지만 원래 자녀들은 한 발짝 물러서서 부모를 바라봅니다. 지예씨가 말한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울분과 격정’을 느끼는 경우는 자녀 자신이 직접적인 학대를 받았을 경우일 때가 대부분이에요. 물론 지예씨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가 치솟고 속상할 거예요. 그런데 이 마음이 성인이 된 딸로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한심하게 보는 정도를 넘어서서 과도하게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예씨가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분리가 잘 돼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머니와 감정이 지나치게 밀착돼 있다는 인상이 듭니다.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지예씨가 맏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어머니가 피해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가능성이 커요.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버지를 이해해주라고도 했지만, 그 전에 어머니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 아픈 어머니를 두고 춤을 추러 간 이야기 등을 지예씨에게 많이 했을 거예요. 성별이 같은 딸의 입장에서 판단 기준이 어머니와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예씨는 딸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엄마의 감정이 엉겨 붙어 있는 시선으로 아버지를 대하게 돼요. 아버지라는 사람을 지예씨만의 판단기준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갖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어머니가 겪은 자괴감과 절망 등에서 영향을 받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지예씨, 새로운 가정을 이루면 나이만 성인이 된 게 아니라 진짜 성인이 됩니다. 앞으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아니고 지예씨 자신과 배우자가 삶에서 가장 중요해집니다. 지예씨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걸 절대 용납할 수 없는지, 그 안에 유연하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진 않은지 등을 배우자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성인으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과정이 지예씨에게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금 남자친구와 지예씨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좋은 관계로 보여요. 독불장군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남자친구는 지예씨를 통해 힘을 얻고, 지예씨는 남자친구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로 인해 잃었던 믿음을 다시 갖게 됐어요. 저는 두 사람이 앞으로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걸 위해 한 가지만 당부하고 싶어요.

두 사람은 모두 부모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해야 합니다. 지예씨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지예씨와 어머니는 동일 인물이 아니에요. 같은 일을 겪어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 다를 거예요. 인생의 행로가 부모님과 같지 않을 거예요. 어떤 것이 행복인지 추구해가는 방향도 다를 겁니다.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니다’ 이걸 명확히 알아야 해요. 아버지가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담대하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필요합니다.

지예씨가 아버지를 감정적으로 너무나 미워하는 것 역시 독립이라 볼 수 없어요. 지예씨가 아버지를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화해하고, 용서하고, 딸로서 도리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에 대한 지나친 분노는 결국 화살이 돼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와요. 지예씨 어머니도 그걸 걱정했을 거예요. 지예씨 역시 언젠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화해를 해야 해요. 지예씨 마음을 들여다 보면 좋겠어요.

결혼식은 독립적인 두 성인이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주변에 공표하는 자리입니다.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를 만나 아버지로부터 진짜 독립을 한다는 걸 분명하게 표현한다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결혼식에 초대하기를 저는 바라요. 배우자의 부모가 어떻게 생각할 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부모의 이혼은 부모의 일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로 생각해 보면 마음이 편할 거예요. 지예씨와 남자친구가 앞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독립된 가정을 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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