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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방어’ 한미훈련에 북한은 왜 질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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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오랜 숙원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전쟁 게임(한미 연합훈련)을 멈출 것”이라고 공언한 데 이어 이틀 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가 지속되는 게 (훈련) 동결의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훈련 중단을 기정사실화했다.
선대부터 누차 연합훈련 때마다 “북침 전쟁연습”이라거나 “북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한미에 경고해 오면서도 지금처럼 확실한 중단 약속을 받아 낸 북한 지도자는 없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상 처음 미 정상과의 회담을 성사시켰을 뿐 아니라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실질적 수확까지 거뒀다. 북한 매체들은 회담 다음 날인 13일 “미합중국 대통령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지”한다고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성과를 홍보하고 나섰다.
연합훈련 중단이 처음은 아니다. 1992년 1월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해 한미가 연합훈련인 ‘팀스피릿’ 중단을 결정하자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화답했다. 실제 이후 약 1년 동안 6차례 사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찰 결과와 북한의 신고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2년 10월 한미는 이듬해 훈련을 재개하기로 했고, 북미관계는 다시 되레 더 악화했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김일성 북한 주석이 IAEA 사찰을 받아들인 이유가 연합훈련 중단이었다”며 “1992년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이듬해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결정하자 김 주석이 거의 실성할 지경으로 화가 나 ‘다 때려치우라’고 말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북한 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목적 훈련’이라는 게 한미의 설명이지만 연합훈련은 북한 지도자에게 분명 위협적이다. 실제 그럴 만한 요소도 있다. ‘참수 작전’이 대표적이다. 2016년 상반기 ‘키리졸브’부터 적용된 ‘작전계획(작계) 5015’에는 적 수뇌부 제거 작전이 포함돼 있는데 전쟁 등 유사시 김 위원장 및 북한 수뇌부를 죽이고 정권을 전복하는 게 작전의 핵심이다. 때문에 당시 북한이 “참을 수 없는 모독 행위”라며 ‘최고존엄’을 겨냥한 작전과 훈련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올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합의된 고위급 회담이 한 차례 무산된 이유도 같다. 북한이 무기한 회담 중지 의사를 통보한 다음 날인 지난달 17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특히 올해의 맥스선더 훈련에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F-22랩터 스텔스 전투기들이 참가했다고 한다”며 “미국의 악명 높은 B-21 전략핵폭격기가 투입된 것도 스쳐 지날 수 없다”고 했다. 전쟁 때 적국 수뇌부를 암살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F-22가 이전 훈련보다 많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북한이 적대 행위로 받아들였을 거라는 분석이 많다.
당 1인자가 신처럼 군림하기 십상인 일당독재 공산국가 중에서도 특히 독재자의 제왕적 성격이 뚜렷한 북한은 ‘존엄 위협’에 유독 예민할 수밖에 없다. 한 외교 소식통은 16일 “과거 조선왕조에서 왕이 외세에 위협 당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며 “북한은 아직 왕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나아가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에 단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중대한 체제 위협 행위로 인식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용이 많이 든다고 투덜대는 연합훈련은 한미뿐 아니라 북한에게도 골칫거리다. 훈련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 식 대응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연구소장은 “북한은 적대관계의 상징적ㆍ실질적 행위가 군사연습이라고 생각한다”며 “때문에 매번 연합훈련에 상응하는 대응 훈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경제적 소모가 극심하다”고 했다. 실제 침공 여부와 상관없이 연합훈련 자체가 북한에게 큰 부담일 수 있다는 얘기다.
연합훈련은 트럼프 행정부가 단독으로 북한에 내밀 수 있는 카드 가운데 사실상 가장 큰 카드다.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 전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진은 치밀한 저울질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미 수교와 제재 완화를 하려면 미 의회 동의가 필요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오로지 재량만으로 북한에 줄 수 있는 체제안전 보장은 연합훈련, 전략자산 전개 중지 정도밖에 없었다”고 했다.
북핵이 여전한 상황에서 한미가 먼저 훈련을 중단할 경우 방어라는 그 동안의 명분이 무색해질 수 있는 데다 힘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믿는 한미 보수층도 반발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선물을 북한에 안긴 건 북한 핵 보유의 핵심 동기가 미 적대 정책에 따른 공포감이라는 판단에서였을 공산이 크다. 주요 적대 행위인 군사훈련을 멈춰 실질적 체제 보장 의지를 보여준 뒤 북한에 비핵화 의지를 주문했을 수 있다. 다른 소식통은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생각보다 치밀한 협상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며 “처음으로 북한을 동등한 위치의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연합훈련 중지 등으로 적대시 정책 폐지 의지를 북한에 보여줌으로써 비핵화를 유도할 수 있는 기초 신뢰를 미국이 얻어냈다”고 평가했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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