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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감독과 연기 천재들 “마이너 인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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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남루하다고 해서 꿈까지 남루한 건 아니다. 우승이 아닌 1승을 바라보는 삶도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 혹여 꿈이 없다 한들 또 어떠하랴. 영화 ‘튼튼이의 모험’(21일 개봉)이 건네는 씩씩한 응원에 힘이 불끈 솟는다.
영화는 존폐 위기에 놓인 고교 레슬링부 선수들의 전국체전 도전기를 그린다. 폴폴 풍겨 오는 짠내가 희한하게 웃긴다. ‘희극지왕’ 주성치도 탄복할 ‘병맛’ ‘B급’ 코미디다. 레슬링부를 홀로 지켜 온 충길을 연기한 김충길(30), 엄마를 고향 필리핀에 보내 주려 막노동을 하는 진권 역 백승환(32), 진권의 여동생에게 반한 불량서클 멤버 혁준 역을 맡은 신민재(35) 등 평균나이 33세인 세 배우가 18세 소년으로 나온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다 싶었다.
연출자 고봉수(42) 감독과 세 배우는 ‘고봉수 사단’이라 불린다. 똘똘 뭉쳐 함께 영화를 만든다. ‘튼튼이의 모험’으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탔고, 남성 4중창단 결성기를 그린 제작비 250만원짜리 코미디 영화 ‘델타 보이즈’로 2016년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신작 ‘다영씨’가 초대됐다. 괴짜 같은 영화들로 게릴라처럼 충무로를 습격한 영화 천재들의 모임 ‘고봉수 사단’을 11일 서울 명동의 한 영화관에서 마주했다.
이렇게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봉수 사단을 알기 위해 ‘튼튼이의 모험’부터 파헤쳤다. 영화의 시작은 제보였다. ‘함평골프고(전 함평농고) 레슬링부가 폐부 위기라는데 영화 소재로 어떠냐’는 김대우 감독(‘방자전’)의 귀띔에 고 감독은 곧장 전남 함평으로 향했다. 레슬링부 감독이 사비를 털어서 한부모ㆍ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라니… 감동이 밀려오더군요.” 배우들은 투자자로도 참여했다. 배우의 지인까지 십시일반 도와 2,000만원이 모였다. “촬영 직전 외부 투자가 무산됐어요. 영화를 꼭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에 힘을 보탰습니다. 배우에겐 더없이 소중한 출연 기회잖아요.”(신민재)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함평 주민들도 재능을 기부했다. 함평중 레슬링부 선수들이 한 달간 배우들의 훈련 파트너로 나섰고, 극 중 진권을 매트에 메다꽂는 중학생 선수의 어머니는 진권의 어머니로 출연했다. 진권 어머니를 흠모하는 고물상 사장도 촬영 장소를 제공한 실제 고물상 사장이다. 예선전 상대팀 코치와 선수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들이다.
코치를 연기한 고성완마저도 배우가 아니다. 본업은 서울 시내버스 7211번 운전기사. 고 감독의 친삼촌이다. ‘델타 보이즈’에는 버스 운전기사로 잠깐 출연했는데 이번에 비중이 대폭 커졌다. “삼촌보다 웃긴 사람을 아직 못 만나 봤어요. 단편영화 ‘개구녕’ 때부터 삼촌을 캐스팅했죠. 당시엔 친척들한테 온갖 욕을 먹었어요. 개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안 빠져서 고생하는 캐릭터였거든요.” ‘튼튼이의 모험’ 전체 촬영 일정을 애초 11일로 계획했다가 10일 만에 끝낸 것도 고성완 때문이란다. “연차 휴가를 딱 10일 냈다고 해서요.”
영화에 날것의 활기가 팔딱거리는 건 배우들의 즉흥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실제인지 메소드 연기인지 헷갈리는 ‘B급 애드리브’ 향연이 혼을 쏙 빼놓는다. “감독님이 배우를 사랑하는 게 느껴지니까 연기하면서 정말 신이 나요. 다른 영화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김충길) “저에겐 우리 배우들이 앨 패시노이고, 대니얼 데이 루이스이고, 로버트 드니로예요. 진짜 연기 천재들이라니까요.”(고 감독)
오합지졸 레슬링부의 좌충우돌은 고단한 삶의 풍경을 비춘다. 소외 계층 문제, 청년 문제, 가난 등 세상의 벽은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돌파하기엔 너무나 단단하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해요. 꿈도 소중하지만, 그 꿈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잖아요.”(신민재) “희망적인 결말보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과정 자체라고 생각해요.”(백승환) “이 영화가 관객에게 사랑 받아서 실제 레슬링부 아이들에게 롱패딩도 사 주고 낡은 매트도 바꿔 주고 싶어요.”(김충길)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튼튼이’영화도 엉뚱하지만 고봉수 사단은 더 엉뚱하다. 고봉수 사단을 먼저 알았다면 ‘영화에선 왜 그 정도밖에 못 웃기냐’고 도리어 타박했을 것 같다. 기발한 창의력을 칭찬하자 한껏 진지하게 돌아온 대답이 꼭 그랬다. “모든 영화는 영감에서 출발하죠. 저희 경우엔 ‘기도발’인 거 같아요. 월요일마다 기도 모임을 갖거든요.”(고 감독)
종교마저 똑같은 운명적인 만남이다. 백승환과 신민재, 김충길은 10년 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연기학원에서 만나, 첫눈에 서로가 “연기 천재”라는 걸 알아본 사이. 삼인방이 고 감독을 만난 건 2015년이다. “어느 날 친한 작가가 굉장한 배우가 있다면서 백승환을 소개했어요. 백승환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급조해 단편영화를 찍었죠.”(고 감독) 이후 백승환이 신민재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김충길까지 합류했다. 완전체가 만든 첫 단편영화가 인디포럼 영화제 초청작인 ‘쥐포(G4ㆍ2015)’다.
고봉수 사단은 마이너 인생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 “고생했던 시간들이 B급 정서의 기반인 것 같다”고도 했다. 진정한 코미디는 슬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법이다. 고 감독은 3개월 속성으로 촬영과 편집을 배운 뒤 200편 넘는 단편영화를 만들며 연출력을 쌓았다. 지인 초대로 미국에 갔다가 한인 라디오 방송국 DJ로 일하던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민들레 풀을 뜯어다 쌈장에 찍어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배우들도 처음 듣는 얘기라며 깜짝 놀라자 “민들레 풀이 몸에 좋다”고 농담으로 응수한다. 백승환은 ‘델타 보이즈’의 주요 배경으로 나온 간판 공장에서 실제로도 일했다. 신민재와 김충길은 “외모만 보면 가장 고생했을 것 같은 얼굴이지만 사실은 고생 축에도 못 낀다”고 겸손해했다.
고봉수 사단은 이르면 올겨울 또 한 번 뭉친다. 무려 제작비 50억원 규모 영화다. 이제는 이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낼 차례다. 고 감독이 마지막 바람을 보탰다. “세 친구는 저만 알기 아까운 배우예요. 충무로 감독님들이 많이 찾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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