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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시민권 받으려면 200년 전 조상 증명하라”… 미얀마의 이슬람 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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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얀마 소수종족들 시민권 빼앗겨
무슬림 캄만족 여교사
미얀마 태생 부모 두었지만
시민권 없이 난민촌 떠났다가 체포
#2
불교 국가의 이슬람 공포증
시민권 조건 점차 까다롭게 바꿔
소수종족이 시민권 인정 받으려면
1824년 이전 조상까지 증명해야
지난달 말 미얀마 북서부 라카인주(州)에 사는 무슬림 여성 ‘마 라 퓨’(이하 ‘라퓨’)는 사흘간 실종 상태에 있었다. 라퓨는 라카인주 촉퓨에 있는 촉탈론 국내 피난민 캠프에서 6년간 지내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평범한’ 사람이다. 실종 3일째였던 5월25일에야 그가 라카인주 탄드웨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국 허가 없이 캠프 밖을 나갔고, 양곤으로 이동하려다 ‘타웅코테’라는 작은 타운에서 체포됐으며, 3일 만에 중노동이 포함된 징역 1년형이 선고됐던 것이다. 변호 기회는 애당초 없었다. 그에게 적용된 법은 ‘1949년 버마 거주자 신고법’이었다.
체포 당시 라퓨는 ‘국민인증카드(NVC)’를 갖고 있었다. 이 카드는 무국적자인 로힝야 주민에게 당국이 시민권 자격 심사를 미끼로 임시 발급하는 것이다. 로힝야족은 자신들을 외국인 취급하는 NVC를 거부해 왔다. NVC 소지자는 당국의 허가 없이는 이동할 자유도 없다. 라퓨가 다른 불교도 여성의 신분증도 함께 지닌 채 양곤에 가려 했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라퓨의 조부모와 부모는 모두 촉퓨 태생이다. 조부모는 옛 시민증인 국민등록카드(NRC)를 갖고 있고, 라퓨도 엄연히 이 나라의 시민권자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할 이유가 없다.” 지난달 29일 기자에게 라퓨의 사연을 제보한 마웅 마웅(가명)은 이 문제가 미얀마에서 무슬림이 처한 현실을 보여 줬다면서 이렇게 개탄했다. 실제로 라퓨는 ‘캄만(Kaman) 무슬림’이다. 캄만은 미얀마의 ‘공식 인종’ 135개에 속하는 종족으로, 당연히 시민권자다. 미얀마에는 주류 버마족을 포함, ‘큰 종족(big race)’이 8개 있고 이들 각각에는 ‘하위 종족(sub-ethnicity)’도 포함돼 있는데 이를 모두 합한 135개 인종이 ‘공식 인종’으로 인정된다. 캄만은 라카인족 산하 7개 하위종족 중 하나다.
미얀마의 ‘135개 인종’ 공론화는 1991년 8월7일 군사정부 기관지에 실린 익명의 고위 장교 기고문에서 비롯됐다. 당시 군정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는 1988년 전국적 규모로 일어난 이른바 ‘88 항쟁’으로 적잖은 충격에 빠졌고, 그 이후 인종과 종교로 보다 세분화한 ‘분열통치전략’을 더욱 강화했다. 물론 그 모태는 1982년 제정된 시민권법이다. ‘따잉 인 따(국가의 인종)’라는 배타적 개념을 도입한 이 법은 조상이 1824년 제1차 버마-앵글로 전쟁의 시작 이전부터 거주해 왔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야만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한다.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2, 3등급 시민이거나 아예 무국적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시민권법 자체의 차별성, 1980년대 말 로힝야족을 배제한 시민증 교체 과정, 그리고 1990년대 초 ‘135개 공식 인종’의 군정 통치록 등장 등 3단계를 거치면서 미얀마는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한 시민권 체계를 완성했다. 바꿔 말하자면, 원래 시민권자였던 로힝야족에게서 시민권을 전면 박탈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족을 이렇게 샅샅이 쪼개 놓은 시민권 제도로 ‘캄만 무슬림’ 라퓨가 NVC를 발급받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모두 설명되는 건 아니다. 빈틈을 채우는 것은 미얀마 사회, 특히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 뿌리 깊이 박힌 ‘이슬람 포비아(이슬람 공포증)’다. 라카인주의 캄만 무슬림이 2012년 폭력 사태 이후 계속 피난민 캠프에 갇혀 지내는 건 그 단적인 사례다.
2012년 폭력 사태는 그 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2차 폭력 사태는 9개 타운십으로 번졌고, 캄만 무슬림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확장됐다. 이듬해 5월 기자가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캄만 난민 살림 빈 굴반(48)은 2012년 10월 23일을 매우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2차 폭동 셋째 날인 이날은 므야욱 타운십 얀테이 마을에서 최소 70명의 로힝야족이 집단학살을 당한 날이기도 했다. 살림에 따르면, 그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쯤까지 촉퓨 방파제에는 이 곳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그는 보안군이 보트 6척에 불을 지르는 장면도 목격했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일부 인원만 시트웨와 인근의 작은 섬 시나모 등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살림은 전했다.
그 동안 캄만 커뮤니티에는 로힝야족과 자신을 차별화하며 미얀마 주류에 편입하려 애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14년 유엔인구펀드의 인구조사 과정에서도 캄만 지도자들은 로힝야족의 인종 표기를 그들이 거부하는 ‘벵갈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두 커뮤니티의 관계엔 금이 갔다. 그럼에도 미얀마 사회는 여전히 캄만 무슬림들에게 가혹하고 냉담하다. 2012년 폭력 사태 후 라카인 승려 ‘우 바르 디 와’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캄만 무슬림 역시 ‘쿨라’(피부색이 검은 무슬림을 비하하는 호칭)다. 그들은 (로힝야족과) 같은 인종에, 같은 핏줄이다. 폭력 사태가 발발하면 캄만은 ‘쿨라’(로힝야족)와 손을 잡지, 라카인 편으로는 오지 않는다.”
아웅산 수치 국가자문역이 실권을 쥔 미얀마 정부는 최근 캄만 무슬림 55가구 157명의 양곤 재정착 계획을 발표했다가 정치권 반발에 직면했다. 과거 군사정권과 연계된 통합연대개발당의 마웅 뮌 의원은 “라카인주 내에서 발생한 암은 라카인주에서 치유하는 게 적절하다”는 섬뜩한 말도 남겼다. 미얀마 하원은 지난 3월 15일 ‘캄만 무슬림 양곤 재정착안’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찬성 136, 반대 236, 기권 8. 캄만 피난민들의 양곤 재정착은 이렇게 일단 좌절됐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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