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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스토리] 포도 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야생의 맛, 내추럴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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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비료ㆍ제초제 쓰지 않고
사람 손으로 키운 포도만 사용
필수 첨가제 이산화황도 최소화
자연 상태 그대로 발효시켜
엄마의 된장처럼 생기있는 맛
“병마다 맛이 다르기도”
미국 일본 프랑스 이어 국내서도 인기
서울 한남동 와인 바 ‘바 빅 라이츠’. 이전에 있던 정육점 이름을 그대로 영어로 옮겼기에 ‘대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작은 와인바에서 내추럴 와인을 마셨다. 이른바 ‘내추럴 와인 애호가’들과 함께였다. 아는 사람만 오는 은둔형 와인바는 꽤나 힙했는데, 내추럴 와인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요즘 가장 힙한 음주 경험으로 회자된다. 몇 병이 비워졌고, 곁들인 음식도 아주 좋았다. 내추럴 와인도 좋았나? 좋았다.
낯선 그 액체엔 공통적인 맛의 코드가 있었다. 집에서 담근 매실주가 다 다르지만 공통의 결을 가진 것처럼, 산미와 쿰쿰함이 차이를 두고 뼈대를 이뤘다. 그 맛과 향을 둘러싸는 두툼한 스펙트럼이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점이 재미였다. 풋풋한 분내에서부터 들판의 허브 향, 야생 꽃의 향기, 사과의 상큼함, 포도껍질의 찌릿함, 그리고 심지어 군고구마 꼭지 부분의 쌉싸름한 맛까지.
앞서 프랑스와 일본, 미국에서 들썩였던 내추럴 와인 물결이 한국에 와 닿았다. 지난 해부터 내추럴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지난해가 한국의 내추럴 와인 붐이 대중에 인지되기 시작한 본격적인 태동의 시기였다면 올해는 꽃망울이 터지는 단계다. 올 초 내추럴 와인 수입사들이 주축이 된 시음 행사가 조용하지만 열렬하게 열렸고, 4월 말 열린 2018 코리아 소믈리에 오브 더 이어 모엣 & 샹동 어워드에선 내추럴 와인 부문이 신설됐다.
와인, 아니 술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면 분명 내추럴 와인은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와인 업계에서 별종으로 취급받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감을 떨치는 새로운 카테고리다. 무엇보다도 그 매력은 부정할 수 없다.
열성 신도를 거느린 신흥 와인 종교
와인은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산업을 이루고 있고, 전적으로 과학의 힘에서 비롯한 대량생산을 그 동력으로 삼는다. 아무도 더 이상 와인을 두고 농산물이라 여기지 않는다. 공산품이다.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조차 공산품에 가깝게 생산된다. 사실은 포도를 농사 지어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지만 그 포도 자체가 와인을 위해 공장식으로 재배된다. 산업의 영역이다. 공장에서 수만 리터씩 효율적으로 양산된다.
반면 내추럴 와인은 농산물이나 다름 없다. 한국으로 치면 슈퍼마켓의 술이 아니라 집에서 빚은 막걸리, 맥주, 그리고 가양주로서의 소주와 비슷하다. 현대 와인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기술들, 이를테면 연구실에서 양산된 통제된 효모, 특정 물질을 빼내는 원심 분리 기술, 합법적이고 안전한 수백 가지의 첨가물들 등을 모두 거부하는 것이 내추럴 와인의 정체성이다. 즉, 인류가 과학과 산업화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야생에 가까운 방식대로 와인을 만든다.
와인 수입사 와인엔 곽동영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와인 산업을 바꾸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던 이산화황조차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가장 특징적인 면이다. 이산화황은 와인의 의도되지 않은 숙성을 막고 보존성을 높여주는 필수불가결한 첨가제다. 먼 거리로 배송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하나 더 중요한 특징은 화학비료나 제초제 없이 오직 사람의 손으로만 재배하고 수확한 포도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인 농사를 굳이 짓는 ‘네오 히피’랄까. 대표적으로 꼽히는 내추럴 와인 신도인, 제로 컴플렉스의 이충후 셰프는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자연을 존중하고 동화되는 내추럴 와인의 철학이야 말로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대변하는 아이콘이라 본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식재료와 음식에서 유기농이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추럴 와인도 지속가능성을 중시한다. 땅을 더 예의 바르게 사용하는 농사로 생산한 포도로 과학 기술 이전의 야생적 방법으로 그 양조장의 공기 중을 떠다니는 효모가 발효시킨 가장 자연적인 상태의 와인을 만든다.
비슷한 부류로 통하는 것이 바이오다이내믹 와인, 그리고 유기농 와인이다. 바이오다이내믹은 정해진 시기에 맞춰 캐모마일, 쐐기풀, 민들레, 떡갈나무 껍질 등 다른 식물이나, 심지어 동물성 비료를 통해 땅의 힘을 북돋는 특정한 농사법을 지칭한다. 유기농 와인은,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배제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를 자연 효모를 사용해 손으로 수확하고 소량의 이산화황만을 사용하는 부류다. 흔히 유기농, 바이오다이내믹, 내추럴 순으로 위계 개념을 이루니 참고할 것. 산업화와 대량생산에 대한 반대급부라는 점에서 철학을 함께 하고, 흔히 같은 무리로 인식된다. 각각의 인증이 주요산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레드 와인에 사용되는 이산화황의 양은 일반 와인에서 리터당 160㎎, 유기농 와인에서 70㎎, 내추럴 와인에선 20㎎으로 정해져 있다. 이 수치엔 와인이 발효되며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황도 포함된다. 이 기사에선 내추럴 와인을 대표격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이 탐지할 수 없는 우연한 변화들
내추럴 와인에 대한 신념은 종교에 가깝다. 특이한 매력과 개성은 분명 중독적일 수 있다. 전형적인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자꾸 눈이 가고 끌리는 그런 남자 같은 와인이다. 내추럴 와인 수입사 뱅베의 김은성 대표는 내추럴 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기라성 같은 내추럴 와인 메이커는 ‘뭘 넣지 않아도 와인이 되는데 왜 넣지?’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맞다. 포도를 발효시키면 아무튼 포도주, 즉 와인이 된다.
애호가들이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장점은 통제되지 않는 다양성으로 요약된다. 자연에 의존하니 인간이 탐지할 수 없는 영역의 우연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특유의 복합성이 발현된다. 곽동영 대표는 “내추럴 와인도 메이커 성향에 따라 만드는 방식, 환경, 생산지의 자연 효모, 품종에 따라 맛은 다 다르다. 동일한 맛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은성 대표는 “내추럴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산미와 독특한 향이다. 탄산감도 있고, 허브 향도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무엇보다 큰 특징은 맛에 생기가 있다는 점이다. 내추럴 와인의 맛과 향이 엄마가 담근 된장 같다면, 관행 와인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된장 같이 느껴진다. 엄마의 된장은 뭔가 구린 향이 나는 것 같지만 맛을 보면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바로 그런 것이 내추럴 와인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충후 셰프는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마치 패션과 같이 누군가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셰프는 또한 “채소와 허브 등 재료를 자연 그대로 사용하며 최소한의 조리와 양념을 가미하는 나의 요리에 내추럴 와인은 그 자체로 요리를 완성하는 양념이 된다”며 요리사로서 느끼는 내추럴 와인 페어링의 재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 ‘임상실험’ 결과도 하나 있다. 곽동영 대표의 경험담이다. “프랑스 와인 유학 중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과 위장염을 앓았다. 와인을 마시면 생기는 증상이었다. 선생님의 영향으로 내추럴 와인을 마셔 보니 증상이 덜했다. 생체실험이었던 셈이다. 자연스럽게 내추럴 와인에 빠져들었고, 유명한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을 방문해보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추럴 와인을 수입하게 됐다.” 많은 내추럴 와인 신도들이 일반 와인에 비해 많이 마셔도 숙취가 덜하다는 점을 어필하기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절대선이란 세상에 있을 수 없듯이, 내추럴 와인을 모두가 곱게 보지는 않는다. 지나친 맹종에 대한 고까운 시선 역시 불가해하지 않다. 수입사 입장에서는 “애물단지”로 칭하기도 한다. “반품 여지가 너무 많다. 다른 말로 위험성이 높다. 같은 박스의 와인인데도 병마다 맛의 표현이 다르다. 이에 대해 최종 소비자의 항의가 들어오면 반품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변질된 와인이 아닐 때가 대부분이지만, 정말로 변질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산화방지제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효모가 살아있어 재발효가 일어나기도 하는 등, 안정적이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입사 관계자의 말이다.
또 혹자들은 내추럴 와인을 “고작해야 마케팅”으로 폄하하기도 하는데, 완전 틀린 이야기만도 아니다. 기존 와이너리 중 톱 클래스, 하이엔드로 갈수록, 또는 생산자의 철학에 의해 내추럴 와인이라는 말이 있기도 전부터 이미 묵묵히 그런 와인을 만들어온 생산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걸 굳이 내세우며 팔아 먹는다”고 삐딱하게 보기도 한다.
분명한 점은 시장에서 내추럴 와인과 바이오다이내믹, 그리고 유기농 와인이 와인의 선택지를 넓힌다는 것이다. 내추럴 와인 신도들이 마치 크래프트 맥주 마니아들이 그러하듯이 활발한 종교 활동을 펼치며 시장을 확장시키고 있다. 아직은 대중적이지 않지만, 소규모 시음회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11월 설립된 신생 와인수입사인 뱅베는 경우 개업 후 1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내추럴 와인은 아직은 별종이나 희귀종으로 취급받지만, 일반 와인의 너무 폭넓은 가격 스펙트럼에 비하면 접근이 용이한 구역에 있다. 곽동영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내추럴 와인은 노동 집약적인 와인이다. 따라서 너무 싼 내추럴 와인도 없고, 생산자들의 마인드에 욕심이 없다 보니 너무 비싼 내추럴 와인도 없다.” 정말 와인이 좋아서 하는 소탈한 히피 같은 사람들이 만드는 안분지족의 와인, 내추럴 와인 붐이 일어나고 있다.
내추럴 와인, 어디에서 시작하면 좋을까?
오르조, 쿠촐로 테라짜, 바 보칼리노, 정식당과 밍글스 등 이름난 레스토랑과 비스트로에서도 적극적으로 내추럴 와인을 목록에 올리고 있다. 아예 내추럴 와인만 들여 놓는 전문 와인바들도 생겼다. 앞서 소개한 바 빅 라이츠가 그렇고, 서울 중구 회현동에 갓 문을 연 피크닉이 그렇다.
바 빅 라이츠
위에서 ‘아는 사람만 온다’고 했는데 정말이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의 바 빅 라이츠는 낯을 가리며 폐쇄적으로 손님을 받는다. 한 번 와본 손님에게만 자리를 내준다. 예약도 100% 필수인데 와본 사람만 받는다. 전화번호를 공개하지도 않아서 어차피 안 가본 사람은 예약도 못 하게 돼있다.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한 손님은 모두 예외 없이 공손히 돌려 보낸다. 유명 레스토랑 출신 요리사가 작은 주방에서 가볍지만 맛은 꽉 찬 안주를 만든다. 아티초크, 문어, 소시지 요리 등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와인 짝꿍들로 메뉴가 채워져 있다.
피크닉
이충후 셰프 팀이 중구 회현동으로 자리를 옮긴 제로 컴플렉스 건물 1층에 새로 낸 와인 바다. 제로 컴플렉스에서 쭉 함께 해온 소믈리에 클레멍씨 역시 내추럴 와인 마니아 중의 마니아로 꼽히는지라 당연히 내추럴 와인 전문 바로 콘셉트를 잡았다. “내추럴 와인은 한 번 맛을 들이면 분명 빠져들게 돼있다. 피크닉이 내추럴 와인의 성지가 되길 바란다”고 할 정도로 열성적인 의지를 담은 곳이다.
이해림 객원기자(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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