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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협상→합의→파기→재도발’ 30년간 되풀이

입력
2018.06.08 04:00
4면

북핵 위기 때마다 수차례 합의

이행과정서 다시 마찰 ‘악순화’

북한이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갱도 폭파 방식으로 폐기했다. 사진은 2번 갱도 폭파 모습. 풍계리=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이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갱도 폭파 방식으로 폐기했다. 사진은 2번 갱도 폭파 모습. 풍계리=사진공동취재단

북한과 미국은 지난 30년간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차례 합의했으나 이행 과정에서의 마찰로 다시 위기가 커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북핵이 국제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이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사진이 공개되면서다. 하지만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협의를 통해 투명성을 증명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논란이 잦아드는 듯했다. 그러던 중 미국은 1992년 9월 첩보위성을 통해 비밀리에 수집해 온 핵 시설 정보를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사진 속 폐기물저장소 추정 건물은 흙과 나무로 덮여 있었다. 이 무렵 IAEA도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채취한 샘플을 분석했는데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과 IAEA 추정치 간에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별사찰 요구가 거세지자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1차 북핵 위기였다. 첫 북미 회담은 약 2개월 뒤 열렸고, NPT 탈퇴 발효를 하루 앞두고 북한이 ‘잠정적으로 유보한다’고 발표해 1차 위기가 가까스로 봉합됐다. 1994년 북미는 북한의 핵 시설 동결과 미국의 경수로ㆍ중유 제공이 골자인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제네바 합의는 2002년 사실상 파기됐다.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을 생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이 이를 인정한다는 취지로 답변하면서다. 북한은 이듬해 1월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짓밟았다”며 NPT 탈퇴를 발표했다.

이렇게 불거진 2차 북핵 위기는 중국이 의장국인 6자회담(2003년 8월 개시)에서 다뤄졌고, 2년 뒤 9ㆍ19 공동성명을 도출했다. 하지만 곧바로 미국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제재로 북한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후속 합의 논의가 교착됐다. 이듬해 북한은 핵 실험을 단행했다.

이후 북미가 2007년 1월 독일 베를린에서 비밀리에 만나 도출한 합의를 토대로 9ㆍ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ㆍ13 합의가 이뤄졌다. 후속 조치로 북한이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고 미국도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며 북미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이 동시에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북핵 검증 주체ㆍ대상ㆍ방식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9ㆍ19 공동성명 역시 사문화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직후인 2012년에는 북한의 핵동결ㆍ미사일 발사 유예와 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이 뼈대인 2ㆍ29 합의가 발표됐지만, 북한이 2개월 뒤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하며 백지화됐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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