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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가 사는 세상] "영화를 보고싶게 만들라" 한 컷을 위해 5만번 셔터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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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범죄와의 전쟁’ 등
14년간 영화 40여편에 참여
포스터ㆍ홍보용 사진 촬영
하정우와는 10편 넘게 작업
배우들과의 신뢰 바탕으로
현장에서 눈에 안 띄게 작업
짜장과 짬뽕 중 선택하는 게 차라리 쉬웠다. 영화 기사에 첨부할 스틸 사진을 고르기가 이토록 고민스러울 줄이야. 이 사진을 고르면 저 사진이 아깝고, 저 사진을 택하자니 이 사진이 눈에 밟혔다. 스틸 사진을 쭉 보면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감흥까지 일었다. 그런 경험 속에서 각인된 이름, 영화 스틸 사진가 조원진(44) 스튜디오박스 실장이다.
영화를 직접 찍지 않으나 다른 의미에서 ‘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영화 내용과 촬영 현장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지난해 ‘택시운전사’와 ‘신과 함께’ ‘강철비’ ‘싱글라이더’ ‘장산범’에서 스틸 사진을 촬영했고, 그 이전에는 ‘밀정’ ‘검사외전’ ‘남과 여’(2016) ‘두근두근 내 인생’ ‘군도’(2014)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 ‘용의자’(2013) 등 숱한 영화들을 거쳤다.
조 실장은 노련한 이미지 사냥꾼이다. 시간과 공간, 인물과 사건, 감성과 메시지가 담긴 장면들이 날 것 그대로 그에게 포획된다. 그렇게 잡힌 결정적 장면들은 종종 영화 전체를 대변하곤 한다. ‘택시운전사’(2017)의 한 컷, 5월 광주로 달려간 초록색 택시의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송강호가 환하게 웃는 포스터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범죄와의 전쟁’(2012)에서 양복을 쫙 빼 입고 잔뜩 폼을 잡은 조직폭력배들이 길 저편에서 단체로 걸어오는 장면도 빠질 수 없다. 비릿하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그 광경은 조 실장이 사진에 담았기에 강렬하게 기억될 수 있었다.
5만 번 눌러 한 장면 잡는다
스틸 사진은 정지된 영화 화면이다. 하지만 영상을 찍는 카메라와 같은 위치는 아니기에 영화 속 장면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사진가의 시선에서 재구성된다. 영화를 따라가면서도 전혀 다른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이유다.
스틸 사진가는 크랭크인부터 크랭크업까지 현장을 붙박이로 지킨다. 5만 번 이상 셔터를 누른다. 영화 한 편당 전체 사진 파일 용량은 평균 3~4테라바이트(TB). 올 여름 개봉을 앞둔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10TB 넘게 찍었다. 그 중 마케팅 스태프가 최종 선택한 50~100컷이 포스터와 보도자료 같은 홍보작업과 마케팅에 쓰인다.
그래서 스틸 사진가는 제작 과정에 참여하지만 마케팅 스태프로 분류된다. 계약도 제작사가 아닌 투자배급사와 한다. 촬영, 조명, 미술, 분장 등은 팀 단위로 움직이지만 스틸 사진가는 혼자다. 아프면 안 된다. 주말이나 명절에만 대여가 가능한 특정 장소에 촬영할 때는 가족 원망도 들어야 한다.
스틸 사진의 목적은 예술성이 아닌 “관객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조 실장은 스스로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가’라 정의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내는 것이 스틸 사진가의 책무”라 믿는다.
과정은 쉽지 않다. 스틸 사진을 위해 연기하는 배우는 없다. 몇 년 전까지도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 때문에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슛’ 사인이 나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촬영 직전 1초와 직후 1초에 전력 투구했다. 조 실장은 “테스트 촬영마저 하지 않는 현장이면 난감 그 자체였다”며 웃었다.
미러리스 카메라가 나온 이후 사정은 나아졌다. 영상 카메라 근처에서 배우의 생생한 연기를 더 잘 담을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카메라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몰입을 깨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래야 원하는 컷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영화 현장에선 영화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좋은 사진은 믿음에서 출발
좋은 사진을 찍는 비결을 묻자 조 실장은 “무관심”이라는 다소 엉뚱한 답을 들려줬다. “배우가 사진가를 인식하지 않아야 자연스러운 표현과 감정이 나온다”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개봉을 앞두고 스틸 사진을 본 배우들이 “이 사진은 대체 언제 찍었냐”고 간혹 묻기도 한다. “저는 현장에 없는 듯 존재하기를 원해요. 하지만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놓치지 않죠. 가끔은 제가 스토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웃음).”
무관심은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배우는 자신이 신뢰하는 카메라는 피하지 않는다. “촬영장에 북적대는 스태프만 100여명이지만 신기하게도 누가 들고 나는지 단박에 눈에 들어와요. 중간에 나타나서 사진만 찍고 사라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 서로 신뢰가 쌓이고, 중요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정우와의 신뢰는 남다르다. 조 실장은 하정우의 표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2006년 영화 ‘시간’에서 처음 만나 ‘숨’(2007) ‘황해’(2010) ‘의뢰인’(2011) ‘범죄와의 전쟁’ ‘더 테러 라이브’ ‘군도’ ‘허삼관’(2015) ‘신과 함께’ 1ㆍ2편, 올해 개봉하는 ‘PMC’까지 10편 넘는 작품을 함께했다. 그는 “‘황해’를 11개월간 촬영하면서 제가 편해져서 그런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하정우의 추천으로 합류한 ‘범죄와의 전쟁’은 경력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윤종빈 감독이 리허설 없이 촬영하는 경우가 많아 사진 작업이 어려웠지만, 그런 조건에서 얻은 귀한 사진이 포스터로 직행했다. “배우와 카메라 사이 거리가 멀어, 이때다 싶었죠. 셔터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기를 끼워서 찍었습니다.” 이 영화 이후 조 실장을 찾는 곳이 많아졌다. 조 실장은 “나를 있게 해준 사진”이라고 했다.
송강호는 촬영 직전 자신만의 유머로 상황을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모습이 ‘택시운전사’ 포스터에 실렸다. “사진 고르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사진을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 구상이 떠올라요. 물론 제 의견을 전달하지는 않죠. 그런데 디자이너가 마치 제 생각을 읽은 듯이 사진을 골랐을 때는 정말 신기합니다.”
‘인랑’과 ‘PMC’ 외에도 ‘공작’ ‘신과 함께2’ 등 조 실장이 참여한 영화 여러 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요즘엔 유해진과 윤계상이 출연하는 ‘말모이’ 현장을 담느라 한창 바쁘다.
사진으로 관객을 만나는 보람
조 실장은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친구 따라 들어간 사진 동아리에서 처음 사진을 접했다. 인화지에 상이 맺히는 광경이 주는 짜릿함에 흠뻑 빠졌다. 조 실장은 “서울과학기술대 ‘어의사진반 막강 31기’ 출신이라는 걸 꼭 써달라”면서 껄껄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은 돈 좀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진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도 못했던 그에게 사진 동아리 선배가 월간지 ‘주니어’ 사진기자 자리를 제안했다. 2000년 입사해 2002년까지 일했다.
영화 스틸 사진 작업을 시작한 건 2004년이었다. 대학 동아리 후배였고 지금은 스튜디오박스를 함께 운영하는 사진가 송경섭 실장이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당시에는 영화 스틸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까불지 마’를 시작으로 어느새 경력 14년, 영화 40여편에 참여했다. 2014년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2011년 SBS 보스를 지켜라’ 크레딧에도 이름을 올렸다. 오래도록 현장에 남고 싶은 게 그의 유일한 욕심이다.
“몇 년 전 집에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다급하게 부르더라고요. ‘아빠 친구가 TV에 나온다’고. ‘범죄와의 전쟁’이 방영되고 있더라고요.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서 늘 보던 얼굴이라 반가웠던 모양이에요. 이제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 아빠 직업을 이해하는 나이가 됐어요. 집에서 늘 보던 사진이 포스터로 걸리는 게 신기하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래요. 극장 포스터와 버스 광고판에 걸린 제 사진을 볼 때마다 마냥 신기하고 설렙니다. 그 보람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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