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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진 찍자” 달콤한 유혹 뒤… 사진업계 성범죄 추가폭로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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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로 협의 후 작업하는 관행 탓
피해 발생해도 제도적 보호 못받아
의상 사전 고지 등 표준계약서 시급
가해자 전시 제한ㆍ제재안 만들어야
“촬영을 빙자한 성폭행이었어요. 카메라가 흉기처럼 느껴졌죠.”
전직 모델 김모(23)씨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2016년 서울 강남구 한 호텔에서 1대1 누드사진 촬영을 하던 중 정모 작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갓 스무 살 넘긴 아마추어 모델 입장에서 ‘완성도 높은 사진을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업계 관행에 따라 계약서를 따로 쓰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촬영인 줄 알고 갔다가 누드사진을 찍기도 했다. 연예인 지망생 최모(20)씨는 지난해 대전의 한 스튜디오로부터 ‘인생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달콤한 제의를 받았다. 무보수 촬영이었지만 인물 사진으로 유명한 작가의 제안인 터라 계약서 없이 촬영에 응했다. 예쁜 모습을 남겨주겠다던 작가는 스튜디오의 문을 잠그면서 돌변했다. 최씨는 “강압적 분위기에 공포를 느껴 ‘시키는 대로 빨리 찍고 집에 가자’는 생각만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최씨는 이름도 바꾸고, 본인의 사진이 온라인 공간에 떠돌까 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유명 유튜버 양예원씨 폭로로 ‘비공개 촬영회’가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사진업계 종사자들은 ‘비공개 촬영회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업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화를 추가 폭로하고 있다.
2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4만명 규모의 사진 동호인 그룹을 운영했던 박재현 작가는 “비공개 촬영회 외에도 사진업계에는 찍는 이와 찍히는 이 사이의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끊임없이 존재했다”고 폭로했다. 박씨는 2016년부터 사례를 모아 여러 명을 고발했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반성하기는커녕 작가명만 바꿔 버젓이 활동했다. 인물사진 도서를 출판한 가해자도 있다.
표준계약서 없이 작업에 착수하는 업계 관행 때문에 모델들은 성범죄가 발생해도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대부분 아마추어 모델은 사진작가나 스튜디오와 작업할 때 노출 수위와 콘셉트 등을 구두로 협의하고 금전적인 부분만 계약서에 명시한다. 3년 전 양예원씨가 비공개 촬영회를 위해 스튜디오 실장과 작성한 계약서에도 초상권 관련 내용만 적시돼 있을 뿐, 촬영 수위 등과 같은 구체적 내용은 인쇄돼 있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을’일 수 밖에 없는 모델을 보호하기 위해, 업계에서 표준계약서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대책으로 제기된다. 페미니스트 사진가 그룹인 ‘유토피아’는 “모델은 ‘촬영’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지 성추행과 성폭력 등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정확한 사진 컷 수와 자세, 의상을 사전에 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현정 변호사는 “지금처럼 구두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 수위나 내용, 촬영시간, 추후 활용 범위 등이 명시된 표준계약서를 업계에서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메라를 권력형 성폭력의 도구로 휘둘렀던 작가가 태연하게 업계로 돌아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도 요구된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지난 19일 성명서를 내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성폭력을 저지른 사진작가의 예술 기금 수혜와 전시를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성폭력을 저지른 개인 프리랜서와 그가 소속된 업체를 제재하는 방안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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