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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후 불에 탄 노부부… 이웃집 청년의 수상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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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4일, 충남 아산소방서로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큰불이 났다”는 다급한 목소리.
하천(아산 곡교천)변을 따라 운전하다 건너편 농가에 불이 난 걸 보게 된 한 대리운전기사 신고였다. 그때 시간이 오전 3시30분쯤, 가로등 하나 찾기 어려운 동네에서 발생한 화재. 불길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진화 작업이 30분째 계속됐다. 아산경찰서 강력2팀 소속 이현 형사가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이 집에 노부부가 살아. 둘 다 못 빠져 나온 것 같아. 형사님 어떻게 좀 해봐.” 한밤 중에 발생한 화재에 이웃들이 몰려나와 발을 동동 굴렀다. 시뻘건 화염과 시커먼 유독가스가 한참이나 이 형사를 가로막았다. ‘빨리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두 시간이 흘렀다. 이 형사가 과학수사팀원들과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장은 예상대로 처참했다. 일단 불에 탄 집은 1970~80년대쯤 벽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로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지붕 등 뼈대만 남아 있었다.
불은 안방에서 난 것으로 추정됐다. 그곳에 불에 심하게 훼손된 노부부 시신이 있었다. 남편 최모(당시 73)씨는 출입문 쪽 바닥에 엎드린 채, 아내 박모(당시 74)씨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살인방화 사건이구나
일단 화재에 의한 사망에 무게를 두고 현장 감식이 이뤄졌다. 겨울철이면 시골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종종 합선이나 전기장판 과열 등으로 불이 나곤 했다. 밤중 화재에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요.” 과학수사팀이 이 형사에게 손짓했다. “피해자들 기도에 ‘매’(목 안에서 발견되는 그을음)가 안 보이네요.“ 단순 화재로 인한 사망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였다. 만약 화재 때문에 숨진 거였다면, 당연히 ‘매’가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죽고, 그 다음에 불이 났다는 건데.” 이 형사가 중얼거렸다. 마침 박씨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농업용 삽 머리가 발견됐다. “자루는 불에 타 사라졌을 테고. 살인이라, 살인.”
1차 부검 결과가 나왔다. 현장에서 형사들이 느끼는 불길한 직감은 대체로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이 형사가 그랬고, 이 형사가 겪은 선배들이 그랬다. 노부부 호흡기에서는 매와 일산화탄소가 검출되지 않았다. 남편 최씨 눈 윗부분에선 2㎝ 정도 칼에 찔린 듯한 상처가 보였다. 아내 박씨 목뼈 쪽에선 외부 충격과 출혈 흔적이 발견됐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사망 예상 시간. ‘시신 부패 상태로 봐선 화재 하루 전쯤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형사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부부의 통화내역 조회도 의미가 있었다. 최씨가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건 화재 발생 이틀 전인 12일 오후 7시였다. 마침 부검이 말해 준 최씨 사망 시점도 12일 저녁부터 13일 오전 사이였다. 이미 노부부를 살해한 뒤 14일 새벽 집에 불을 질렀을 거란 가설이 세워졌다. 물론 집에서 죽였을 수도,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서 살인한 뒤 시신을 집으로 옮겼을 수도 있었지만, 시간상 흐름은 어느 정도 머리 속에 정리되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 ‘출근 도장’
“그럼 누가, 왜 그랬을까?”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아직 나온 게 없었다. “시골 마을이라 화재가 난 집 근처에 폐쇄회로(CC)TV도 없었어요. 인근 도로를 중심으로 방범 CCTV 20여개와 사설 CCTV 6개에 찍힌 영상을 확보해 지나가는 차량들을 볼 수밖에 없었어요. 며칠 동안 분석해 봤지만, 범행 추정 시간대에 사건장소로 향했다고 볼 만한 차량도 없었고, 인근 기지국에서 조회된 총 6만 건 안팎 통신내역을 조사했는데도 달리 의심할 만한 걸 찾아내질 못했어요.”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새 2012년이 됐다. 보름 정도 지난 거였지만, 연도가 바뀐 사실은 수사팀에겐 심적 무게가 상당했다. 그때쯤 수사팀은 현장이 있는 마을로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수사할 게 있으면 수사를 했고, 없으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이 형사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점심에는 뭐를 주로 먹는지, 이들이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뭔지, 귀를 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사팀은 어느 새 ‘동네 주민’이 돼 있었다. “주민들이 별 생각 없이 말하는 것 중에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솔직히 절실했습니다.”
처음엔 그를 경계하던 주민들이 조금씩 동네에서 벌어지는 얘기들을 터놓았다. 그 중 결정적인 얘기가 이 형사 귀로 들어왔다.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라는 제보였다.
숨진 노부부 집 길 건너편에 2층짜리 다세대주택이 있었다. 그곳 1층에 안기복(당시 50대·가명) 상태(당시 33·가명)씨 부자(父子)가 살고 있었는데, 화재가 있기 즈음부터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주민들 얘기. “예전에 그 집에 빚을 독촉하러 남성들이 몰려오기도 했다”는 증언도 여럿 등장했다.
구체적 알리바이에 오히려 의심
수사 방향이 사라진 아버지에게로 급격히 쏠렸다. 사건 발생 이후 자취를 감췄다는 이유만으로도 의심을 받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기복씨는 노부부 사망일과 화재 발생일에 직장이 있는 천안에 있던 걸로 확인됐다.
남은 건 아들 상태씨였다. 이 형사는 쉽게 이들 부자에게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상태씨와는 아버지 행적을 물어볼 요량으로 시간 날 때마다 만나 외식도 하고 사는 얘기도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러면서 묘한 의문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보통 1, 2주 전 얘기를 물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말을 못해요. 근데 한 달도 훨씬 넘은 화재 당시 자신이 뭐했는지 행적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하더라고요. 마치 조사를 받을 때를 대비해 준비를 해놨다는 듯이 말이죠.”
실제 상태씨는 이 형사가 노부부 사망 추정일(2011년 12월 12~13일)과 화재 발생일(14일 새벽)에 ‘(사건과 관련해) 본 것 좀 있냐’고 묻자, 이런저런 얘기를 거침없이 털어놨다. “13일 밤 늦게 생선회를 집으로 포장해 와서 다음 날까지 혼자 술을 마셨죠. 그리고 영화를 봤어요.” 화재가 있었으니까, 기억이 더 또렷했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상태씨 대답들이 의심의 불을 더욱 지폈다.
결정적 단서는 우연히 포착됐다. 2월 14일 상태씨가 살던 다세대주택 주인이 집 뒤편에 닭을 키우기 위해 설치해 놨던 울타리를 고치다 숨진 최씨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발견한 것. 더구나 지갑이 떨어진 위치는, 상태씨가 살던 집 창문 근처였다. 창문을 통해 버렸을 공산이 컸다. “동네에 서식하던 족제비가 그 집 닭을 물어간 덕이라고 해야 할까요?”
수사에 활기가 돌았다. 이 형사는 지갑 발견 사실을 숨기고, 상태씨에게 화재 당일 행적을 좀더 자세히 묻기로 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새벽 3시쯤부터 회를 안주 삼아 술을 먹었고, 컴퓨터로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다가 음란 동영상 두 개,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 받아서 봤어요.” 역시나, 너무나도 구체적이었다. 거짓말탐지기 테스트 결과도 힘이 됐다. 숨진 노부부 본 적이 있는지, 사고 현장에 가본 적이 있는지, 불을 지른 적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모두 부인했다. 결과는 ‘거짓’이었다.
3월 8일 이 형사 등 수사팀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상태씨 집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고, 컴퓨터 로그기록을 유심히 살폈다. 2시 34분과 3시 7분에 음란 영상을 다운로드 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3시30분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다운로드 받은 기록도 있었다.
수사팀은 압수수색 기록을 바탕으로, 상태씨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질문을 다시 던지기로 했다. “어떤 영화였지?” 상태씨가 답했다. “중세시대 칼 싸움 영화 같은데…” 걸려들었다 싶었다. “‘삼총사’(알렉상드르 뒤마의 17세기 배경 소설이 원작) 같은 건가?” 상태씨가 예상대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다, 맞다. 그 영화.”
“돈만 훔치려다 발각돼” 실토… 무기징역 선고
본격적인 추궁에 들어갔다. “네가 다운로드 받은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2차 세계대전이 배경)였는데, 이 영화가 중세시대 영화인가?” 계속된 질문에 상태씨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인 건야!” ‘물 한 잔만 달라’던 그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고, 돈도 필요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상태씨는 애초 돈만 훔칠 목적으로 “돈 좀 있다”고 소문난 노부부 집을 찾았다고 했다. 별다른 벌이가 없던 터라 궁핍한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았다. 때마침 여자친구와도 이별했다. 그는 “돈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지만, 혹시 몰라 주방에서 쓰던 칼(길이 30㎝)을 챙겨 들고 나왔다”고 진술했다.
13일 새벽 4시쯤 담을 넘어 최씨 집에 들어선 상태씨는 마당에서 1m 길이 삽을 들고 두 사람이 잠든 안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100㎏이 넘는 체구를 지닌 그는 최씨 주머니에서 현금 9만원이 든 지갑을 꺼내 나오다가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최씨 부부가 인기척에 놀라 깨자 손에 쥐고 있던 삽으로 최씨 얼굴과 박씨 머리를 때리고, 숨겨온 칼을 꺼내 바닥에 쓰러진 최씨 뒷목을 찔렀다. 침대 위에 쓰러진 박씨 왼쪽 가슴(2회), 오른쪽 쇄골 부위(1회), 목 부위(1회)를 연이어 찔렀다.
상태씨가 노부부 집을 다시 찾은 건 이튿날 오전 3시20분쯤이었다. 지문과 DNA 등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다. 현장에 있던 양초에 불을 붙여 안방 장롱 속 옷가지에 올려놓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내려 받았다. “훔쳐 온 지갑은 현금을 꺼낸 뒤에 지문을 지우고 창문 밖으로 버렸습니다.”
4월 8일 피의자로 전환 된 뒤 이틀 뒤 구속, 재판에 넘겨진 상태씨에게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현금 9만원 정도 금품을 빼앗기 위해 노부부 생명을 빼앗은 데다, 범행 수법 또한 지극히 잔혹하고 반인륜ㆍ반사회적이다“고 밝혔다.
아산=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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