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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리지 말라” 하나님이 형상화를 금지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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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를 숭상한 이스라엘
신이 아니라 신의 상징을 신뢰
하나님보다 언약궤 먼저 찾아
잘못된 신앙행태 탓에 패전
현대엔 보이는 우상은 없어도
특정 교회ㆍ목사ㆍ교리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 수도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시작"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술에 별 재주가 없어서 그러셨나? 실제로 발굴된 토기를 살펴보면, 그들이 만든 그릇이나 항아리는 투박하고 멋이 없다. 멋진 무늬가 들어간 토기들은 대개 수입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고민은 더 심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걸핏하면 ‘소’로 그리거나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나 송아지로 만들어 경배했을 때마다,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화를 내셨다. 실제로 하나님을 마치 소처럼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그린 고고학적 발굴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무형상주의, 기독교의 특징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가 주변 민족의 종교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유일신 사상’이라고들 많이 생각한다. 주변 종교들은 대부분 ‘다신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 유일신 경향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가장 두드러지게 달랐던 것은 ‘무형상주의’였다. 주변 어느 민족의 신도 자신의 형상을 제발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는 형상을 부숴버리기까지 하는 유대교를 아주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형상이 없는 신을 믿는 일이 고대 서아시아에서도 있긴 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강력히 형상을 반대하는 신앙 행태까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외의 어떤 것도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했다. 이를 ‘우상(偶像ㆍidol)’이라고 불렀으며 철저히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열렬히 우상을 숭배했다. 심지어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도 우상을 자주 숭배했었다. 그 형상에는 남자와 여자, 짐승, 새, 물고기, 해, 달, 별들이 있었다.(신명기 4:16-19).
무언가 ‘가시적’인 숭배의 대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는 것이 우상숭배 금지며 무형상주의였다. 사실 인간의 종교적 심성은, 자기가 섬기는 대상을 어떻게든 가시화하여 신심의 현실감을 높이고 싶어 한다. 신의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더 실감날 것이고, 십자가나 염주를 손에 쥐고 기도하면 몰입도가 높아진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갈 때면 자연스럽게 목에 걸린 십자가를 붙든다. 그런데 어째서 성경은 형상을 금기할까?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나님보다 언약궤를 먼저 찾다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사무엘상 4:3) 이때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혼미했던 때였다. 장로들이 전쟁 실패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이유를 모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진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패배의 원인을 언약궤의 부재로 판단한 것이다.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4:3) 성경의 모든 구원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공식을 따르자면,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부터 찾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언약궤부터 찾았다.
언약궤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이 들어있던 신성한 상자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한다는 임재의 상징이었다. 언약궤와 함께 하여 이스라엘은 이적과 승리를 체험했었다. 선조들이 언약궤와 함께 요단강을 갈라 기적적으로 건널 수 있었으며, 여리고 성을 돌 하나 던지지 않고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 어리석은 인간은 신이 아니라 신의 상징인 형상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형상이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약궤와 함께 승승장구했던 ‘경험’은 오히려 덫이 되고 말았다. 자신을 구원하였던 것이 언약궤가 아닌 하나님이었음을 망각한 것이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형상일 뿐, 스스로 어떤 힘을 발휘하는 영험한 물체가 아니다.
결국 패배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실제로 전쟁터에 들여왔다. 언약궤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던 쪽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블레셋이었다.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진에 그들의 신이 들어갔다.’”(4:7)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고 이스라엘의 신이 전쟁에 임했다고 고백했다.
반면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언약궤라는 물체를 신뢰했다.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4:3) 결국 이스라엘은 전쟁에 패한다. 그리고 블레셋은 언약궤를 자기네 신전으로 가져간다.
뒤이어 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언약궤를 숭상한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이적도 벌이지 않으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볼 줄 알았던 블레셋에게는, 정말로 언약궤가 이적을 일으켰다. 블레셋의 신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된 후 신전 안에 있던 다곤 신의 신상이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독한 종양이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던 블레셋에게는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언약궤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나무 상자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 언약궤는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후 언약궤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마치 하나님이 치워버린 것만 같다. 무너졌던 성전을 나중에 다시 세우지만, 거기에는 없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라 여겨졌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그 공간에 있었다. 두 번째 성전에서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조차도 사라졌다. 하나님은 자신을 상징하는 어떤 형상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염려하는 형상이 반드시 물체적인 사물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케 한 어떤 기제(mechanism)라고 그 경험은 기억 속에 형상화되는데, 그 경험의 형상(image)이 그만 우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언약궤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과거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던 경험의 기억 속에서 하나님은 쏙 빼어버리고 ‘언약궤 들고 오기’만 신뢰하게 된 것이다.
우상숭배, 항상 경계해야 한다
아마도 지금 현대 신앙인들에게는 전자의 형이하학적인 우상화보다는 후자의 형이상학적 우상화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회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상징이나 형상을 숭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가 벌어지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처럼 신앙인들의 특정한 신앙 행위나 경험, 전통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대치해 버리는 우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 40일 기도를 드리고 마침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하자. 다음에 또 다시 어려움이 닥치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그 40일 기도가 먼저 마음에 떠오른다. 심지어 40일에 40일을 더하여 확실한 기도의 효과(?)를 기대한다. 기도는 미신이 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신앙 경험이 우상화한다.
교회의 좋은 전통인 기도를 예로 들어 죄송하지만, 실은 기도뿐만이 아니다. 특정 교회, 특정 목사, 특정 교리가 우리 마음의 성소를 차지하고 있다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 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만 눈이 가 있어, 정작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못한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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