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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잘 마셔야 일 잘하는 직원” 폭음 부추기는 기업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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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삐뚤어지게 마셔야 접대” 인식
회계법인 등 ‘술 군기’ 센 곳서
음주문화 환멸 느껴 이직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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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도 구태 못 벗어… ‘소폭’ 난무
술잔 돌리며 주량 적은 직원 만취
직장인 54% “필름 끊기도록 폭음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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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 채널에 기대는 조직문화
법인카드도 지나친 회식문화 한몫
“회사 등산 행사 뒤풀이 자리에서 부사장이 맥주잔에 소주를 끝까지 채우고 맥주를 몇 방울 탄 다음 ‘벌주’라며 먹이는데, 무려 4잔을 원샷을 시키더라고요. 결국 귀갓길에 토했습니다.” (20대 무역회사 직원)
“실적이 좋으면 성과급으로 회식하고, 안 좋으면 분발하자며 회식을 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 3차까지 회식 하니 1년 만에 살이 7㎏ 찌더군요.” (20대 전직 유통업계 종사자)
“긴 술자리 끝에 만취한 클라이언트(고객)가 동료 여성 회계사에게 호텔 방 번호를 묻더라고요. 명백한 성희롱이죠.” (30대 회계사)
‘1가지 술로, 1차만 하고, 9시 전에 술자리를 끝내자’는 메시지를 담은 ‘119 절주 운동’은 우리 사회, 특히 직장에서 술자리가 2가지 이상의 술로, 2, 3차는 기본이며,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것이 예사였음을 방증한다.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과 ‘워라밸’(일상과 업무의 균형), 그리고 최근의 미투(#Me Too) 운동 등의 영향으로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기업들 사이에서는 이런 무절제한 술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 적지 않다. 과거의 습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부장님’들이 있고, 접대를 하는 쪽에서도 받는 쪽에서도 그래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야 접대라고 여기는 인식이 뿌리깊은 탓이다.
이런 기업문화는 잦은 폭음과 만취의 주된 원인 중 하나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이달 2~9일 직장인 직장인 7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3.8%가 ‘필름이 끊기도록 폭음을 해봤다’고 답했고, 이들 중 폭음 빈도가 주 1회 이상이라는 답변이 17.5%에 달했다. 좀더 공신력이 있는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의 ‘2016년도 국민건강영양조사’를 봐도 월 1회 이상 7잔(여성은 5잔) 이상 술을 마시는 월간폭음률은 남성은 절반이 넘었고(53.5%), 여성도 4명 중 1명 꼴(25.0%)이었다.
여전히 술로 하는 영업ㆍ접대
전문직 집단인 회계법인은 ‘술 군기’가 센 편으로 통한다. 30대 중반의 회계법인 중간 간부 A씨의 한 주(5월21일~27일) 일정을 보면 클라이언트(고객)와의 저녁 약속이 사흘이나 된다. 점심 술자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주말 골프 약속 1건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몇 년 전에 회계사 한 명이 지방에서 클라이언트와 술을 마시다 사망한 사건 이후로 회사에서 과음을 자제하라고 지시했지만, 회계 감사 대상 회사로부터 계속 의뢰를 받으려면 술자리를 통해 관계를 다지는 수밖에 없어요.” A씨는 영업이나 접대를 해야 하는 ‘을’의 입장에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만큼 길고 잦은 술자리를 견뎌야 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에 평균 두 번 정도 이런 술자리를 갖는데, 보통 7시에 시작해 자정쯤 끝나지만, 따로 출근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재무적 투자자(FI)와 술을 마시면 새벽 2~3시까지 마실 때도 많다”고 전했다.
과음 탓에 건강이 나빠져 휴직하는 사람들도 많고, 술에 중독이 되어 회사 동료들끼리 새벽까지 마시는 이른바 ‘자폭 술자리’가 생기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지난해 회계법인을 나와 일반 회사로 이직한 회계사 B(33)씨 역시 과도한 음주 문화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회계 감사 시즌(1~3월)에 지방 업체로 1박2일~3박4일 출장을 나가면 귀가 걱정이 없어 술자리가 밤새 이어지고, 마지막 차수를 호텔 방에서 하기도 합니다. 다음날 온종일 괴롭지만 상무님(파트너급 회계사)의 영업을 위해 젊은 회계사들이 동원되는 거죠.” 정신을 놓고 마시는 이런 술자리가 성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B씨는 “고객 중 한 명이 여성 회계사에게 호텔 방 번호를 물어봐 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전했고, A씨는 “평소 매너가 좋아 보이던 대기업 팀장이 노래방에서 자신의 여성 부하직원을 마치 도우미처럼 무릎 위에 앉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30대 후반의 C씨는 국회 보좌진 출신으로 현재 경제 관련 협회에 몸을 담고 국회를 상대로 한 대관(對官) 업무에 수년 째 종사 중이다.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와 같은 ‘대목’에는 국회 보좌진들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자리가 이어진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인데, 아무래도 일과 시간 중이어서 긴장감이 남아 있는 점심 식사 때 보다는 근무시간 이후에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면서 “술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개인사 얘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역회사 항공수출업무부에 근무하는 D(25)씨에게 ‘갑’은 대형 항공사다. D씨는 “항공사 클라이언트들과 저녁도 아닌 점심자리에서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술을 마신 적도 있다”며 “점심 시간에 만취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어라 마셔라”는 상사
외부 접대에 비해 기업 내부의 회식 문화는 많이 개선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과거의 술 문화에 갇혀 있는 기업들도 적지는 않다. 편의점과 마트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유통 계열사에서 2016년부터 1년간 영업관리팀에 소속돼 일했던 E(28)씨는 실적 발표 날마다 가진 부서 회식 탓에 몸무게가 급격히 불었다. E씨는 “스승의날에는 카네이션 판매량, 밸런타인데이 때는 초콜릿 판매량 등 무슨 날만 되면 수시로 실적이 발표되는데, 그 때마다 술을 동반한 회식을 해 일주일에 평균 두 세번은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다”고 말했다. 회식은 보통 고깃집, 호프집, 노래방으로 이어지는데, 주종은 주로 ‘소폭’(맥주에 소주를 타서 마시는 것)이다. 아직도 과거 몸무게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그는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 문제가 생겨 한 때 조심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고 지금은 회식 문화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건설업종 종사자들 역시 여전히 상사들이 주도하는 회식에 길들여져 지내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건설사 대리 F(31)씨는 “현장에서 협력업체와 일을 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쌓인 앙금을 저녁에 반주를 함께 하며 푼다”면서 “이렇게 술을 긍정적으로 보는 문화가 오랜 기간 자리잡다 보니 상사들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을 안 하는 직원으로 낙인 찍기 일쑤”라고 말했다.
여기엔 ‘술 잘 마시는 직원’이 ‘일 잘하는 직원’이라는 나이 든 상사들의 구태의연한 인식이 크게 작용한다. 지난해 몇 번이나 회식 끝에 ‘필름’이 끊겼다는 F씨는 “술자리에서 술을 꺾어(나눠) 마시면 잘 마시는 상사가 잔을 돌리며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술을 마시게 유도한다”며 “그 결과 술자리의 모든 사람이 술을 가장 잘 마시는 상사 기준으로 음주를 하게 되고, 주량이 적은 직원들은 만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술이 조직 안팎 문제 해결의 매개체
우리 조직문화는 왜 여전히 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까.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여전히 조직 안팎의 문제를 투명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비공식적 채널이나 인간 관계 등을 동원해야 궁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면서 “이런 비공식적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쓰이는 대표적인 매개체가 술”이라고 말했다.
법인카드가 지나친 회식 문화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다. 손애리 삼육대 보건관리학과 교수는 “한중일 3국을 비교해 보면, 중국은 직장에서 술자리에서 실수하면 책 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 직장 동료들과는 술을 잘 안마시고, 일본은 직장에서 술을 마셔도 자기 돈을 내야 하니 주머니 사정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제한다”면서 “반면 우리나라는 회사 돈으로 술을 마시는 접대 문화가 발달했고, 자기 돈을 내고 먹는 게 아니다 보니 상대방에게도 인심을 쓰며 맘 편히 만취하는 그런 문화가 형성됐다”고 했다.
김광기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회사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말자는 캠페인만 해서는 한계가 뚜렷하다”면서 “세계에서 가장 자유방임적인 술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이우진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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