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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은 과구만”… 고민정, 문재인 한마디에 인생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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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넉달 전 처음 만난 문재인
말과 글이 일치하는, 진짜배기
아나운서에서 '문재인의 입'으로
“(우리) 같은 과구만.”
인생을 걸게 한 한마디는 어쩌면 그것이었다. 대선 넉 달 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2시간 내내 ‘세상’에 대한 얘기만 했다. 선거에 나선 정치인이 ‘인재’를 영입할 때 흔히 하는 “무슨 역할을 맡아 도와달라”거나, “당신이 꼭 필요하다”거나, “이런 정치 상황에서 큰 힘이 될 것이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나’ 같은, 통상의 정치인이라면 ‘뜬구름 잡는다’고 했을 대화를 나눴다. 그러더니 헤어질 때 문 대통령은 허허, 웃었다. “저한테 ‘같은 과구만’ 하시더라고요.” 돌아오는 길, 남편 조기영 시인과 그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가자!”
그렇게 그는 삶의 핸들을 ‘문재인’에게로 틀었다. 14년 차 아나운서에서, 더문캠(문재인캠프) 대변인을 거쳐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급회전해 직진 중이다.
이상한 일이다. 강요도, 권유도, 그 흔한 정치 얘기 하나 없었는데도 고민정(39) 청와대 부대변인은 그 만남에서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각, 철학, 지향점이 같다고 느꼈어요. 게다가 직접 만난 문 대통령은 그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상상했던 사람과 같았거든요. 허구가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인했고, 지금은 그 확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죠.”
안정적인 공영방송 아나운서 자리를 버리는 건 그래도 도전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이미 판세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으니, 그게 무슨 모험이냐고, 안전한 선택 아니었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시가 돈이 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시인을 남편으로 둔 가장, 두 아이의 엄마였다. 더구나 대선 캠프는 생계를 보장해주는 곳이 아니다. “아나운서를 하면서 내일 당장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게 한국의 정치판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만약 당선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자문했고, ‘그래, 안돼도 후회가 없다’고 결심해서 인생을 걸기로 한 거죠.”
여린 이미지와 달리 그는 단단한 사람이다. 대학 때 노래패 회장을 했고, 새내기 때 만난 11살 연상의 시인 선배와 7년 열애해 잘 나가던 아나운서 시절 결혼했다. 이 이력이 그의 강단을 증명한다. 게다가 그 남자가 앓던 희귀병(강직성 척추염)까지도 그는 감당했다. 무슨 유행처럼 공중파 방송사 아나운서들이 재벌가로 시집갈 때, 그는 ‘아나운서, 시인과 결혼하다’라는 뉴스를 만들어냈다.
삶을 바꾼 세 번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까. “한 번도 없어요. 그 선택들이 아니었다면, 편하게는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고민정은 없겠죠.” 그러더니 “한번을 살아도 멋있게 살아야지요”라는데, ‘인생의 멋’을 논하는 여성이 청와대에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왼쪽 팔목에 찬 이른바 ‘이니시계’는 양쪽 가죽 날개가 보기 좋게 닳아 있었다. 마치 청와대에서 보낸 시간과 고민이 응축된 흔적 같았다.
청와대 생활은 중년 남자의 삶
새벽 6시에 출근해 쉼 없는 일정
인터뷰 날이 처음 쉬는 일요일
-5월 10일로 문 대통령도 취임 1주년을 맞았지만, 고 부대변인도 청와대 생활 1년이 됐죠. 청와대 업무 강도가 만만치 않지요?
“맞아요. 취임 초기에는 새벽 5시에 출근했어요.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새벽 6시에 나오죠. 일요일에도 매주 출근을 했고요. 평일엔 퇴근을 해도 기자들과 저녁 약속이 많지요. 보통 ‘중년 남자’의 삶을 살고 있달까요? 업무가 워낙 많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도 (취임) 1년 지나고 나서 (임종석) 비서실장이 ‘일요일 근무는 최소화 하자’고 해서 다른 행정관들과 근무 순번을 정해 일요일에는 번갈아 쉴 수 있게 됐어요. 공교롭게도 (인터뷰 하기로 했던) 오늘이 처음 쉬는 일요일이네요. (웃음)”
고 부대변인과 인터뷰는 사실 한달 반 전 약속했던 일이었다. 그 사이 4ㆍ27 남북정상회담, 5ㆍ10 대통령 취임 1주년 등의 빅이슈로 13일에야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50일쯤은 지나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확실한 ‘예약’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은 꼭 지킵니다”라는 말로 불안감을 일소했다. 군더더기 없는 그 말이 반문을 묵직하게 눌렀다.
-청와대 부대변인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과거 정부 때마다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던 자리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처음 청와대에 들어올 때도 역할이 딱 정립돼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그래서 저도 좀 힘들었죠. ‘문재인 정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아나운서 경험을 살려서 국빈 방한 행사 때 사회를 보거나, 대변인이 여건상 배석하기 어려운 자리에 대신 들어가요. 특히 김정숙 여사의 대외 행사는 제가 모두 챙기지요. ‘청와대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 청와대의 입장을 밝히거나 오보에 대응하기도 하고요.”
-문 대통령과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요?
“2017년 더문캠 들어갈 때요. 그 전에 개인적인 인연은 없어요.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을 통해서 문 대통령을 알게 됐죠. 탁 선임행정관과는 신영복 선생님의 제자라는 인연이 있고요. 2016년 여름쯤 그가 지나가는 말로 ‘(정치권에 가서) 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한 적이 있어요. ‘KBS 정상화’ 때문에 고민이 많을 때였고, ‘내가 과연 언론 자유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라는 생각에 자책하면서 무력감을 토로하니 한 말이었어요. 저는 장난으로 받아들였죠. 그런데 그 해 12월에 (대선캠프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쉽지 않을 테니, 섣불리 결심하지 않아도 된다. (문 대통령을) 만나보고 나서 결정해도 된다. 네 삶이 더 중요한 거다’라면서요. 혼자 벌어 세 식구를 먹여 살리는 처지라는 걸 아는 사람이니까요.”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겠군요.
“그럼요. 삼시세끼를 다 먹어도 살이 빠지고, 잠을 자도 꿈 속에서 그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딱 한 달을 고민한 뒤, 2017년 1월 (문재인) 후보를 만나고 결정했죠. (후보와 헤어지고) 나서면서 남편과 ‘가자’ 했어요.”
-문 대통령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나요?
“네.”
-만나서 어땠기에 결심을 하게 된 건가요?
“문재인이란 사람에게 굉장한 신뢰를 느꼈어요. ‘내가 원하던 지도자상이 이 분이구나’ 하는. 제가 아나운서가 된 이유도 단순히 방송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거든요. 비슷하게 그들의 삶이 좀더 나아지게 하고 싶어서 누군가는 정치를 하겠지요. 그런데 아나운서가 되고 보니 원고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가 힘들었어요. 한계를 느끼던 시점이었죠. 게다가 대한민국이라는 큰 틀이 바뀌지 않고서는 내가 속한 KBS조차 바뀔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문 후보를 만나고 나서 (KBS) 안에서 수많은 선, 후배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나 하나 정도는 밖에서 힘을 보태면 알이 깨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 좋은 직장 때려 치우고 내 인생을 걸어야 하는데, 이 분은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지도자라는 신뢰가 생긴 거죠.”
-직접 만나본 문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그런데 또 착한 사람! ‘착하면 바보’라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착한 사람이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간다면, 내가 내 아이를 키우면서 ‘착하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어떤 얘기를 나눴나요?
“권력이 어떻고, 자리가 어떻고, 이런 얘기는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한민국, 정의로운 대한민국, 그에 대한 열망을 많이 말씀 하셨지요. 간절함이 느껴졌어요. 또 (공영방송 정상화와 관련해) 언론인들이 처한 상황,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왜 아나운서가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물으신 기억이 나요. 여행 얘기, 사는 얘기 같은 것도 했고요. 그런 대화를 하면서 2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한 뒤 헤어지는데, ‘허허’ 웃으시더니 ‘(나랑) 같은 과구만’ 하시곤 가시더라고요. (웃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철학, 지향점이 같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래도 한번 만나고 어떻게 인생을 걸기로 결단할 수가 있나요?
“방송을 하면서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다 보니, 본능적인 감이 생긴 것 같아요. 직접 만나보면 말과 글이 다른 사람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른 거죠. 그런데 문 대통령은 그간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상상했던 그 사람이었어요. 허구가 아니고 진짜란 걸 2시간 동안 확인했죠.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그 확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고요. 말과 글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그래서 대통령은 제게는 대통령이라기 보다 닮고 싶은 스승 같은 존재예요.”
남북정상회담 ‘하나의봄’ 야외공연
‘15초 암전’ 짜릿… 이런 게 통일인가
탁현민 행정관과 같은 스승 인연
과거를 깨나가는 과정 아닐까 싶어
인연이 길고 두텁다는 탁 선임행정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탁 선임행정관과는 인생의 첫 스승으로 섬긴 고 신영복 선생 덕분에 알게 됐다고 한다. 가깝게 지낸 지 벌써 7, 8년 된 인연이다. 탁 선임행정관은 정권 초 논란을 몰고 다닌 인물이다. 과거 저서에서 왜곡된 여성관을 밝힌 사실이 드러나 여성계와 정치권에서 거센 비판이 일었다. 사퇴 압박에도 그러나 문 대통령은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은인자중 하던 그는 남측 예술단의 평양공연과 4ㆍ27 남북정상회담 만찬과 환송 공연 등 행사 전반의 연출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탁 선임행정관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죠.
“옆에서 지켜보기가 힘들었어요. 알고 지낸 게 벌써 7, 8년이 됐고 그간 신뢰가 쌓인 관계였으니까. 언젠가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동안 나 좋을 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내 위주로 생각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문재인이란 사람을 만나고 나서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참 문제가 됐을 때 ‘왜 그런 책을 썼느냐’,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느냐’ 뭐라고 하기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가 변한 사실도 감안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죄를 지었더라도 교화 과정을 거쳐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발을 딛고 살수 있도록 하자는 게 우리 사회의 합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거의 일로 그의 현재와 미래도 평가절하 하고 예단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지금은 자신이 스스로 과거를 깨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청와대는 탁 선임행정관을 유임하기로 결론을 냈던 건가요?
“지금의 청와대는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똑같이 움직이는 곳이 아니에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민주적 공간이죠. 그런 민주적 논의를 거쳐서 결론을 내지요. 그때도 이견이 혼재했어요. 결론은 그가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이죠. 연출가는 많아요. 하지만, ‘하나의 봄’ 같은 남북정상회담의 환송 공연을 만들어 내는 기획력은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요.”
-청와대 부대변인으로서 참여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역시 남북정상회담일 텐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을 꼽는다면요?
“(평화의집 앞) 환송 공연 때 불을 다 끈 것이죠! 사실 조명 몇 개는 켜 놓을 줄 알았어요. 별빛 밖에 없는 곳이니까요. 불을 모두 끄니 정말 깜깜했죠. 순간 짜릿했어요. 정상 뒤로는 남측, 북측이 서로 뒤섞여 서 있었거든요. 제 옆에도 북측에서 온 여성(수행원)이 있었고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평화로운 시골에서나 들었던 개구리 소리를 남과 북이 총부리를 겨눠온 군사분계선에서 듣다니, 남과 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로 옆에 있다니, 이런 게 서로를 믿는 거구나! 그런 짜릿함이었죠. ‘이런 게 통일이구나’ 싶었어요.”
약 15초 간의 암전. 이건 사실 사전에 알려지지 않은 깜짝 이벤트였다. 공연을 생중계로 내보내던 손석희 JTBC 앵커는 “방송 사고 아닙니다. 현장에서 불이 꺼진 거고요”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공연이나 영화가 시작되기 전 통상의 소등과는 달랐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지만, 연내 종전선언도 평화협정도 ‘약속’일 뿐이었다. 그러니 남북 정상의 경호를 담당했던 쪽에선 비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날의 암전은 곧 ‘신뢰’였다. 고 부대변인은 암전에 이은 공연 뒤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북측 여성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껴안은 건 그도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암전과 관련해선 사전에 우려와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고 부대변인은 “탁 선임행정관이 이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 추진력은 그의 장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어떤 게 가장 걱정됐나요?
“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대통령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간 이 분이 정상들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나간 모습을 봐왔으니까요. 물론 상대(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니 그건 좀 우려가 됐지만요. 대통령이 늘 누구를 만나든 성심, 성의를 다해온 것을 봤을 때, 정상회담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문 대통령에게 신뢰를 보낼 것이다, 그렇게 믿었어요.”
-정상회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대목에서 성공을 예감했나요?
“도보다리 회담이 오랫동안 진행되는 걸 보고. (미소) 대통령의 일정을 잡을 때는 늘 대략의 시나리오를 짜요. 그러나 항상 시나리오대로 되지는 않죠. 이번 도보다리 회담을 준비하면서도 이미 협상은 실무 단위에서 상당 부분 진행했고,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 도장을 찍고 발표하는 정도일 테니 그때 그리 할 얘기가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30분 넘게 회담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진짜 뭐가 되는구나!’ 싶었죠. 그때 우리(청와대 비서진)도 TV로 지켜봤는데, 훗날 교과서에 평화의 상징으로 실릴 세계사적인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죠. 또 들리는 건 새소리뿐인데도, 카메라에 비친 두 정상의 표정, 입 모양만 보고서 모두들 해설위원이 돼서, 지금 무슨 얘기를 했을 거라는 예측, 평가, 기대를 쏟아놨죠. 그 뒤 만찬장에 사회를 보러 섰는데 두 정상이 굉장히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만찬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고요.
“만찬도 예정보다 40분이 늦어졌어요. 막판에는 남은 코스 음식을 한꺼번에 들여 달라고 한 뒤에 억지로 끝냈죠. 사실 두 정상도 하루 종일 긴장을 했을 것이고 그러니 피곤하기도 했을 법한데, 제가 확인한 두 분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감정이 상했다거나 불편한 일이 있었다면 그렇게 편안한 표정이 나오지 않죠.”
-만찬에서 노래 공연을 한 제주 소년 오연준군에게 ‘고향의 봄’을 청한 건 즉흥적인 제안이었나요?
“원래 시나리오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만 부르기로 돼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최종 리허설에서 ‘고향의 봄’도 불러봐 달라는 제안이 나왔어요. 원래 ‘고향의 봄’으로 인기를 얻은 친구니까(오연준군은 TV 동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고향의 봄’을 불러 감동을 줬고 이 영상이 SNS에 퍼지면서 유명해졌다). 들어보니 정말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고향의 봄’도 넣자는 의견이 나왔죠. 하지만, 또 한 쪽에서는 시나리오대로 해야 한다며 반대했어요. 결국 시나리오에는 넣지 않더라도 현장 분위기를 봐서 사회자 직권으로 결정하고 호응을 끌어내기로 한 거죠. 물론 오연준군에게는 부르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려줬고요. 결과는, ‘남한에서는 마이크 쥔 사람이 주인이다. 그러니 한 곡 더 요청해도 되겠느냐. 박수를 많이 쳐주시면 연준군도 응해줄 거다’라고 하니 막 박수가 터져 나왔고 부르게 됐죠.”
-굉장히 감동적이었다고 하던데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대통령도 ‘고향의 봄’을 들을 때 울컥 해서 그 다음 만찬 모두발언을 해야 하는데 감정이 잘 잡히지 않아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선 자리에서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바로 보였는데, 따라 부르고 있더라고요. 속으로 ‘그래, 이거지’ 했어요.”
-김정숙 여사의 대외 일정도 함께 하면서 가까이 보셨을 텐데, 어떤 분인가요?
“보이는 그대로예요. ‘유쾌한 정숙씨’라는 별명대로 정말 유쾌하세요. 밝고 에너지가 넘치죠. 평창동계패럴림픽 기간에는 거의 강원도에서 살다시피 하셨어요. 저도 너무 힘들던데, 그 와중에도 에너지가 충만하시더라고요. 응원할 때도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서 하는지요. 뭐든지 대충하는 법이 없는 분이죠. 대통령이란 자리는 스트레스도 많고, 공격도 받는 자리잖아요. 그렇게 힘들 때 누군가 에너지를 채워줘야 하는데, 그런 긍정 에너지가 남편에게 큰 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 부대변인은 산문집을 세 권 냈다. 그 책들 중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가진 거라곤 세상밖에 없는 이들의 마이크가 되고 싶었다.” 아나운서가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였다. 정치인들도 흔히 출사표에서 이런 표현을 쓴다. 다만 당선되고 나서는 ‘표 있는 사람들의 마이크’가 돼서 문제일 뿐. 이미 정치권에 발을 디딘 이상, 그 앞에 놓인 선택지에는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 정치인도 있을 것이다.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지요?
“최근 방송에 나갔을 때도 진행자가 물어보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저는 미래를 미리 따져보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KBS를 나왔겠어요?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지도 안갯속인데…. 하지만, 무엇에 걸어야겠다 싶으면 확 걸어요. 그러니까 남편과 결혼했죠. 미래를 내다봤다면, 가난한 시인과 결혼했을까요? 자신감 하나로 현재에 충실할 뿐이에요. 문재인이란 사람에게도, 대통령이 되든 안되든 그와 함께 하는 게 내 생에 값진 순간이 되겠다고 판단했으니 (인생을) 걸었지요.”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선출직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한데요.
“지금도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막상 아나운서가 된 뒤에는 공허하게 느껴진 때도 있었죠.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을 위로하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알겠어요. 특히 세월호 유족을 지난해 8월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그 분들이 했던 얘기가 마음에 남아요.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청와대인데, 3년 넘는 시간 동안 왜 오지 못했을까’라면서 펑펑 우시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도 한 게 없거든요. 하늘나라로 간 아이들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보상금을 안긴 것도 아니에요. 그저 대통령이 진심 어린 위로를 하고, 안아주고, 사과를 하고, 식사를 함께 한 것뿐이죠. 그런데도 ‘응어리가 풀렸다’는 표현을 하시더라고요. 정치가 꼭 정책이나 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그는 “그렇게 ‘내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정치인이 돼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럴 때 흔히 정치 기사에서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쓴다.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그런 표현으로 풍기는 거다. 그런데 고 부대변인의 그 말에선 셈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저 그렇다는 자신의 머릿속을 그런 말로 나타내고 있었다.
“가진 거라고는 세상 밖에 없는 이들의 마이크가 되겠다는 첫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 도구가 글이 될 수도, 방송이 될 수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죠.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의지는 없지만 삶은 모르는 거니까.”
-인생에서 했던 중요한 선택이 몇 가지 있을 텐데, 결정할 때 기준이 뭐였나요?
“대학에 들어가 노래패를 택한 것, 남편과 결혼한 것, 그리고 문재인이란 사람을 만난 것이 그런 선택들이었죠. 돌이켜보면, ‘나를 믿어주는구나,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구나’ 하는 확신이 들면 고민 없이 택했어요. 그리고 그 기저에는 스스로한테 당당하고 싶은 욕심이 늘 있지요. 나한테는 쪽 팔리지 말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니까.”
-아나운서의 삶을 버리고 정치권으로 들어왔는데,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느낀 적은 없나요?
“있지요. 있지만, 대통령만 바라보고 가요. 어느 조직이든 그 정도 어려움 없는 곳이 있을까요? 그래도 이렇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장님(문 대통령)이 있는 회사는 처음이니까.”
-작년 대선 전에 문 대통령을 지지한 각계 인사들의 글을 모은 책 ‘그래요 문재인’에 참여했죠. 거기 실린 글을 보니 ‘(캠프에 들어가서) 참 좋다, 재미있다, 행복하다’는 구절이 있던데, 지금도 같은가요?
“음……. 재미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재미있진 않아요. 하지만 보람은 있어요. 행복한가? 행복… 행복하니? 이건 어렵네요, 진짜 어렵다… 자신 있게 답은 안 나오네요.”
-지금 고비를 넘고 있는 중인가요?
“요즘은 ‘어느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대선으로) 바뀐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해요. 답을 찾고 있는 중이죠. 어찌 보면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최선일 수도 있고요.”
남편 조기영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아내를 두고 “고민정씨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처음 마음 그대로 꾸준히 지키는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얘기를 들려주자, 고 부대변인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첫마음이란, 위기가 왔을 때 나를 버티게 해주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겁 없는 선택을 해오고, 그 선택을 했던 첫마음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해온 고민정의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말과 글이 다른 사람이 되지 말자.’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신영복 선생님이에요. 그분을 내 스승으로 삼자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었어요. 직접 뵈니 책에서 쓰신 것과 실제가 일치하는 분이더라고요. 2008~2009년쯤 아는 선배를 통해 처음 뵈었거든요. 그런데 말할 때도 글이 나오는 분이더라고요. 그 뒤에 청강할 수 있는 강의는 직접 가서 듣기도 했어요. 글처럼 순수하고 맑고 강한 분이었어요.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했죠. 두 번째로 본, 말과 글이 같은 이가 문재인이라는 사람이고요. 그래서인지 글을 쓰면서부터는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아요.”
아나운서였던 그가 펜을 잡게 된 건 ‘늘 말을 흘려 보내며, 소비만 되는 것 아닐까’란, 입사 6년 차에 찾아온 슬럼프가 계기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방송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할 때였다. 고민 끝에 휴직한 뒤 남편과 중국으로 떠났다. ‘가졌을 때 놓아야 의미 있다’는 책 속의 진리를 믿고서였다. 대지를 여행하며 하루 하루를 찍고 기록하다 보니, 글이 됐고, 책을 냈다. 그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여백이 마음속에 있지 않으면 글이 잘 써지지도 않고, 썼다 하더라도 결국엔 지워버리게 되고 만다. 그런데 언어의 정수인 시를 쓰는 일은 오죽할까.” 정치권은 ‘마음의 여백’을 불허하는 영역이다. 재미있고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그의 눈빛이 흔들렸던 게,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앞서 나가는 게 아니라 함께 걸어가며 울어줄 수 있는 정치의 힘을, 언어의 하수종말 처리장 같은 정치판에서 글만큼의 무게를 갖는 말의 정수를. 그래서 언젠가는 스스로도 기대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가진 거라곤 세상 밖에 없는 사람들의 진짜 마이크로서. 그의 말처럼 삶은 모르는 거니까.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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