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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핵폐기 채찍’에 반기 든 북한

입력
2018.05.16 18:04
1면

핵 반출ㆍ리비아식 해법 요구에 반발

볼턴 비난하며 “체제보장이 먼저”

“판 깨기 아닌 기싸움 차원” 분석

北, 한미훈련 맥스선더 문제삼으며

남북 고위급회담 당일에 무기 연기

지난 3월9일 일본 도쿄의 공중 TV 화면에 김정은과 트럼프의 얼굴이 비친 모습. 도쿄=AP 연합뉴스
지난 3월9일 일본 도쿄의 공중 TV 화면에 김정은과 트럼프의 얼굴이 비친 모습. 도쿄=AP 연합뉴스

북한이 16일 예정된 남북 고위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연이어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까지 언급해 한반도 정세가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내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은 협상 판 자체를 깰 수도 있다는 초강경 메시지를 던졌다. 북핵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미 정부 내 대북 강경파들이 최근 높은 수위의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데 대해 “호락호락 끌려가지 않겠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미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의 입장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 형태로 나왔다. 김 제1부상은 담화에서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다가오는 조미수뇌(북미정상)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은 전했다. 이어 “백악관과 국무성(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선 포기, 후 보상’ 방식을 내돌리며 그 무슨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니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니 핵ㆍ미사일ㆍ생화학무기의 완전 폐기니 하는 주장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있다”며 “과연 미국이 진정으로 건전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미(북미)관계 개선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북한은 이날 새벽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한미 연합공중훈련 맥스선더를 겨냥해 “판문점 선언에 대한 노골적 도전이며 한반도 정세 흐름에 역행하는 고의적 군사적 도발”이라며 이날 예정됐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이에 통일부는 대변인 성명을 내고 “판문점 선언의 근본정신과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유감”이라며 고위급 회담에 나올 것을 촉구했다.

작정한 듯한 북한의 이날 태도는 미국 내 대북강경파들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일방적 핵폐기 ‘항복선언’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생화학무기로 폐기 대상을 넓히는 등 연일 목소리를 높이는 데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특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우 실명을 거론하면서까지 불만을 드러냈다. 담화는 “볼턴 같은 자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됐던 과거사를 망각하고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요 뭐요 하는 ‘사이비 우국지사’들의 말을 따른다면 조미수뇌회담을 비롯한 전반적인 조미관계 전망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핵 폐기의 보상 차원으로 제기한 경제지원 등 북미 간 논의 범주를 벗어난 볼턴 식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볼턴을 통해 나오고 있는 요구들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는 데 대한 불만과 불쾌감이 터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볼턴 보좌관은 선 비핵화를 전제로 한 리비아식 해법을 줄곧 주장해왔으며, 최근에는 북한 핵무기를 폐기해 테네시주의 오크리지로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북한이 취해야 할 비핵화 조치 수위를 한층 높였다.

북한은 동시에 “미국이 우리가 핵을 포기하면 경제적 보상과 혜택을 주겠다고 떠들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 한번 미국에 기대를 걸고 경제건설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경제 지원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지만 속내는 체제보장 방안을 확실히 받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맥스선더 훈련의) 전략자산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폐기 등 대북체제보장 문제를 분명히 가져가겠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 언급이 실제 회담을 깨겠다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국의 협상 태도를 바꾸기 위한 기싸움 차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북한도 담화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퇴로를 열어뒀다. 북한이 외무성 공식 발표가 아니라 김 제1부상 개인 담화로 발표 수위를 조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실제 판을 깨겠다는 게 아니지만 북한의 전략과 의도는 언제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계기”라고 평가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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