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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의 봄] 도보다리에서 30분짜리 아름다운 무성영화 찍은 두 정상

입력
2018.04.27 22:20
6면

30분짜리 깔끔한 한편의 컬러 무성영화였다. 남북 정상이 27일 오후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생 다박솔을 함께 심은 뒤 판문점 도보다리를 산책하다 나눈 단독대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의 한 페이스북 친구는 “오늘 판문점에서 수 많은 일이 일어났고, 수 없이 많은 사진이 찍혔지만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은 두 정상이 도보다리에 앉아 30분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라는 글을 올렸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얘기다.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눴는지보다는 무릎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주 앉은 두 사람 주위로 펼쳐진 봄 풍광, 말 그대로 ‘한반도의 봄’의 아름다운 정경에 필이 꽂혔다. 숲은 연두색과 담황 담적 담자색 등 담채색 계열의 빛으로 눈부셨다. “꽃보다 신록”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한발 먼저 푸른 잎을 무성히 피운 나무는 틀림 없이 귀룽나무이거나 왕버들이렸다.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잎들은 상수리와 같은 참나무 종류의 신록일 터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계관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절창 ‘디 오크’(The Oak)에서 봄철의 저 참나무 누른 빛깔을 ‘봄에는 영롱하고 살아 움직이는 금빛’(Bright in spring/ Living gold)이라고 노래했다. 흰구름처럼 피어난 조팝꽃도 눈에 들어왔다.

새들도 울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무성영화는 아니다. 연초록 신록 푸르러 가는 늦봄 숲 속에 가장 아름답게 우는 되지빠귀. 몇 개 소절로 이어지는 그 울음 소리는 세계에서 가장 표음력이 뛰어난 한글로도 표현하기 어렵지만 짝을 부르는 고운 노래는 영혼을 다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끼끼끼끼~’ 꽤 높은 톤으로 우는 청딱다구리 소리도 들리고, ‘씨유 씨유시’ 산솔새 소리도 들려왔고, 박새는 ‘쭈빗 쭈빗’하고 울었다. 꿩~꿩 아련히 장끼소리도 들렸다.

정작 두 사람은 아름다운 풍광이 눈과 귀에 안 들어 오는지 얘기에만 열중했다. 간간히 꽤 큰 손짓을 섞어가며 말하는 폼이 매우 진지해 보였다. 미중 패권경쟁 한 가운데 놓인 한반도의 절박한 상황과 비핵화 약속에 쏠려있는 지구촌의 관심, 한민족의 미래와 운명에 대한 고민, 남북이 함께 평화와 번영에 이를 수 있는 방법 등에 대한 얘기들이었을까. 진지한 모습이 그 어떤 화려한 언변이나 약속, 선언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이날 새들은 두 사람이 나눈 은밀한 대화를 엿들었을까. 햇볕도 그들과 연초록 신록을 따사롭게 내리쬈다.

일찍이 나라들간 정상회담 역사에서 전세계인들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두 정상이 단독 회담하는 사례가 있었을까. 그 자체로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편의 드라마였다. 눈을 떼지 못하고 ‘도보다리 무성 영화’를 지켜보면서 문득 유치환의 시 ‘깃발’의 첫 머리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대목이 떠올랐다. 아 누구인가, 저처럼 아름다운 영상의 무성영화를 연출한 이는.

이계성 논설고문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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